내로라하는 배우를 거의 다 만나봤다. 영화처럼 멋있는 배우, 연기인지 실제인지, 캐릭터인지 그인지, 종잡을 수 없는 그들을 많이도 만나봤다. 단연, 특별했다. 뭐랄까, 영상 속 그녀는 숨소리조차 배우스럽지만, 카메라 밖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말이 청산유수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고, 카리스마가 차고 넘칠 줄 알았는데 웃음이 넘쳐났고, 까칠할 줄 알았는데 편안했다.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그 장면에선 기억이 전혀 안 나요." "잠깐, 내가 뭐라고 했죠? 그 말은 쓰지 말아 봐요.(웃음)" 상반된 모습에 익숙해질라치면, 브라운관의 모습이 떠올라 섬뜩하기까지 했다. 많고 많은 배우 앞에 남발된 수식어, 천생 배우. 그녀는 진짜였다.
종횡무진 바쁘다.
내가 스트레스를 일로 풀어요. 그래서 다작을 해요. 제 연기 지론이, 백지! 한 작품이 끝나면 나를 백지처럼 만들고 다시 시작하죠. 그렇지 못하면 나중엔 덧칠한 게 올라와 연기에 군더더기가 생기죠. 깨끗하게 지우자, 그리고 다시 입히자. 한데 최근에 영화를 찍으면서 나 자신을 버리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말로만 백지 상태였지 완벽하지는 못했구나 싶어서 참 버겁게 작품을 마무리했어요.
여운이 남는 강한 역할을 많이 하는데, 평소 마인드 컨트롤을 어떻게 하나?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도 그래요. 조금 오버해서 말하면, 저는 배우에 적합하게 태어난 것 같아요. 연기적인 부분이 아니고 일을 너무 사랑하거든요. 한때는 '왜 나는 일만 하고 살까?'라는 생각에 많이 지치기도 했죠. 그래서 큰마음 먹고 몇 달 쉬다 보면 연기가 너무 하고 싶더라고요. 쉬어보니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는 거예요. 할 게 없는 거죠. 현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새로운 캐릭터 제안이 들어왔을 때 가장 흥분되는, 그게 저였어요.
연기 외에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맛있는 걸 먹을 때 행복해요. 저는 특별한 게 없어요. 그저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집에 오면 완벽히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그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방법이에요.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겠는가?
당연하죠. 하지만 한 시간 뒤에 일어날 일도 모르는데, 먼 훗날을 어찌 알겠어요. 아직까지는 그래요. 배우라는 직업은 제게 그래요.
드라마와 영화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몇 안 되는 배우다.
물론 그것을 제가 판단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네요. 배우는 선택되어지는 직업이고, 그래서 하고 싶다고 해도 못 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럼에도 저는 두 장르를 오가며 연기할 수 있어 감사하고, 그래서 최선을 다합니다. 간혹 영화를 줄곧 해오던 배우들은 드라마를 부담스러워하기도 하지만, 저는 영화만큼 드라마도 사랑한답니다. 두 장르의 매력은 분명히 다르죠.
참 행복한 배우다. 고로 성공한 배우다.
그게 행복한 것인지 간혹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문득 '감사하구나, 나 자신에 빠지지 말자, 최선을 다하자' 하고 마음을 다잡죠. 하지만 그런 부분을 깊게 생각하지는 못해요. 연기에 빠져 사느라고요.
자신의 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두 가지가 있어요. 감독님이 칭찬을 해주셨을 때, 또 관객들이 좋은 말씀을 해주셨을 때 보람을 느끼고 에너지를 받아요. 관객들의 반응은 주로 인터넷을 통해 봅니다. 제 이름을 간혹 검색해보거든요.(웃음) 저와 관련된 기사는 대부분 챙겨 보고, 댓글도 보는 편이에요.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사람이 어떻게 다 똑같은 생각을 하겠어요. 안 좋은 말이 있더라도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세상의 이치죠.
최근 촬영한 영화 <허스토리>의 민규동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선생님을 가리켜 '대배우'라는 말을 했다. 거창한 수식어가 참 많은 배우다.
진짜요? 기분이 너무 좋네요. 제가 칭찬에 약합니다.(웃음) 민 감독이 제게 시나리오를 건네며, 처음 주는 거라고 했어요. 그 감사함과 함께, 한 번은 작업해보고 싶은 감독이기에 촬영 전에 많이 흥분됐죠. 사실 <허스토리>를 작업하면서 무척 힘들었어요. 제 연기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때마다 감독님이 손을 잡아줬고, 민 감독이 아니었으면 이 영화를 못 끝냈을 거예요.
저는 저 자신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아요. 평소에 저를 아주 편안하게 해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렇지 않은 성격이었다면 피곤했을 거예요.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오직 본인들만의 노력으로 일본 정부에 당당히 맞선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로, 당시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을 만큼 유의미한 결과를 이뤄냈음에도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관부 재판'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김해숙은 극 중 과거를 숨긴 채 아들과 함께 살아온 '위안부' 피해자 '배정길' 역을 맡았다. 연출을 맡은 민규동 감독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완벽한 배우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바로 떠오른 배우인데, 촬영하면서 왜 대배우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캐릭터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하는 연기라는 것이 저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김해숙의 연기에 찬사를 보냈다.
시나리오 읽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두려웠지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머니들의 과거의 삶은, 매체를 통해 많이 접했지만 현재의 이야기는 없었어요. 이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더한 아픔을 겪으며 사는 할머니들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캐릭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들었다.
행여 그분들에게 누가 될까 봐 정신적으로 많이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이게 맞나?' 연기를 하고도 맞는지 몰라서 모니터 앞에 가질 못했어요. 다른 작품은 하면 할수록 그 역할에 빠져드는데, 이건 하면 할수록 가닥이 안 잡혔거든요. 몸이 점점 아파오고, 결국 생각을 정리해야 했는데, 크나큰 아픔을 겪으면 감정의 변화도 없을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간 이런저런 험한 역할을 다 해봤지만 '이게 감정의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죠. 그래서 재판 장면에서 울음을 꾹 참았어요. "컷!" 소리가 나는 동시에, 오열했지요. 연기를 잘했다는 소리보다 살아 계신 그분들이 "당신이 연기한 게 우리와 비슷하다"는 말을 더 듣고 싶었어요.
갈수록 가닥이 안 잡히는 연기라… 궁금하다.
가슴이 찡하니 아팠어요. 멍이 든 느낌이랄까요? 그러다가 재판 장면을 찍기 전엔 촬영을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팠어요. 아마도 그 장면의 연기를 하기가 두려웠나 봐요.
그녀는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모습으로 영화 내내 등장한다. 최근의 몇몇 작품에서도 노메이크업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섰다. 그래서일까. 인터뷰를 위해 메이크업한 모습이 낯설지만, 참 고왔다.
오늘 참 곱다.(웃음)
저도 메이크업한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반대로 화면 속 메이크업을 안 한 제 모습을 보고도 놀라요. 진하게 화장하고 화려하게 옷 입는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메이크업도 메이크업인데, 이번 영화에 함께 출연한 다른 분들이 심하게 마른 분들이라 스틸 컷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세 분을 뭉쳐놓은 듯한 제 몸….(웃음) 그래서 말인데, 극 중에서 제가 건강검진을 받고 나오면 주변 사람들이 "얼굴이 왜 그렇게 살이 빠졌노?" 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걸 당최 소화를 못 하겠는 거예요. 그 전날부터 어찌나 고민이 되던지, 감독님께 조용히 다가가서, "이 대사가 저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제 몸을 보세요"라고 나지막이 말씀드렸더니, 감독님이 어지간해서는 대본을 수정하지 않는 분인데 단번에 고쳐주시더라고요.(웃음)
영화 <허스토리>는 김해숙을 비롯해 김희애, 예수정, 문숙, 이용녀가 출연한다. 모두 막강한 내공을 지닌 명품 배우들이다.
여배우들끼리의 작업은 어떤가?
견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으시죠? 저 역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저희는 거의 동지애 수준이었어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로 다독여주기 바빴거든요.
그래서 결과물이 나왔다. 어떤가?
어떻게 촬영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혹시 제가 배우랍시고 그분들에게 누가 되면 어쩌나, 아마 함께 출연한 모든 배우가 같은 생각이었을 거예요. 연기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예감이 안 좋은 거예요. 계속 힘이 없고 기분도 다운됐어요. 심하게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빨리 다른 작품을 하자 싶었죠. 그랬더니 괜찮아졌어요. 요즘요? 좋아요. 최근엔 여행도 다녀왔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김해숙이라는 사람의 일상이다.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 죽을 듯 해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 작품에 빠져든다.
"저는 저 자신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아요. 평소의 저는,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제가 편하게, 화장도 안 하고 대충 걸쳐 입고 그렇게 평범하게 지냅니다. 쉴 때는 집 밖에 잘 나가지도 않아요. 움직이는 게 귀찮아 TV 보며 빈둥빈둥. 그렇지 않은 성격이었다면 피곤했을 거예요."
온전히 두 세상을 나누어 산다. 그게 김해숙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