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빠져 있던 드라마가 끝날 때는 꼭 가슴 한쪽이 저려온다. 해피 엔딩이든 새드 엔딩이든 마찬가지다. 그건 아마 작품 속 캐릭터들과의 작별이 못내 안타까워서일 것이다. 지난주 또다시 가슴 한쪽이 저렸다. 바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끝났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의 등장인물들은 단순히 드라마 속 캐릭터가 아닌, 우리 주변의 누군가다. 20대 초반, 계약직의 불안정한 삶에 알바까지 해야 생계가 유지되는, 아직은 삶이 버거운 누군가. 50세가 넘었지만 가진 재산 하나 없이, 가족과도 소원해진 누군가. 젊은 날 반짝 빛났던 재능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누군가. 머리가 하얗게 센 자식들이 여전히 그저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불안한 누군가. ‘정희(오나라 분)’도 그렇다. 20년 동안 한 남자를 못 잊어 가끔은 술로, 가끔은 사람으로 슬픔을 위로하는 우리 주변의 누군가였다.
정희와 나라, 그녀들의 사랑
<나의 아저씨>가 마지막 회만을 남겨두었던 어느 날 배우 오나라를 만났다. 그녀는 아직 정희였다. 인터뷰하던 날이 마침 촬영 마지막 날이라 인터뷰가 끝나고 회식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저는 며칠 전 마지막 촬영을 했고, 드라마의 마지막 촬영은 오늘이에요. 끝나고 모두 모이기로 했어요. 다들 빨리 만나고 싶어요. 드라마는 조금 우울한 느낌이었을지 몰라도 현장에서 저희끼리는 정말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정희네’에서 촬영한 장면의 80% 이상이 애드리브였을 정도예요. 다들 워낙 연기가 뛰어나고 재미있으니 주제 하나만 던져주면 그걸 가지고 끝도 없이 애드리브를 해요. 그걸 보고만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몰랐죠.”
오나라는 정희와 닮았다. 처음 본 기자를 반갑게 웃으며 먼저 반기는 모습이나 터프하면서도 싹싹하게 스태프들을 일일이 챙기는 모습은 정희가 ‘정희네’에 오는 이들을 먼저 반기며 무심한 듯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과 꼭 닮았다.
“정희와 저는 닮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물론 있죠. 저는 오랜 시간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기 때문에 무대 위 화려한 조명과 관객의 환호가 끝난 후 찾아드는 공허함을 알고 있어요. 정희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가게를 닫은 후 손님들이 돌아가고 나서 혼자 남게 됐을 때의 공허함, 그때 정희가 느꼈을 외로움을 저는 이해할 수 있죠. 그리고 오랜 시간 한 남자를 사랑해온 것도 비슷해요. 정희는 20년 동안 ‘겸덕(박해준 분)’을 사랑해왔는데, 저도 20년 동안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저는 사랑을 이뤘지만요.(웃음)”
손님들이 정희네에서 돌아간 후 정희는 홀로 외로움을 견뎌낸다. 술에 취한 채 빨래를 하며 스스로 “나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잘 살고 있습니다.” 소리내어 읊조리는 모습은 처절할 정도다. 정희의 밝음이 외로움을 가리기 위함이라면, 오나라의 밝음은 오나라 그 자체이다.
“정희는 조울증처럼 밝았다가도 어느 순간 어두워지죠. 그렇지만 저는 항상 밝아요. 정희처럼 삶이 우울하지 않죠. 그리고 쉬어야 할 때는 정말 쉬어요. 슬퍼하는 게 아니라.”
지난 5월 10일, <나의 아저씨> 14화가 끝난 후 ‘정희’는 포털 사이트의 인물 캐릭터 일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그날은 정희가 익숙했던 웨이브 헤어가 아닌,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묶어 넘긴 채 겸덕이 있는 절에 찾아간 장면이 방영된 날이다. 정희는 겸덕을 향해 울부짖었다.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다고. 다 아프다고. 애원하는 정희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정희가 안쓰럽고 그녀를 보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희를 연기한 배우 오나라가 누군지 궁금해졌을 것이다.
“검색어 1위에 올랐을 때, 이제는 시청자들과 소통하는 배우가 됐구나 싶은 생각에 감동스러웠어요. 그동안 연기를 칭찬해주시는 분들은 계셨지만 배우 오나라에게 관심을 갖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은 수면 아래 숨어 계셨거든요. 그러던 분들이 이번에는 수면 위로 올라와 표현해주시더라고요.”
지금까지 오나라가 맡았던 역할들은 현실감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재산을 말아먹는 재벌 집안의 딸,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 냉정한 비서 등 스토리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조미료 같은 역할을 주로 해왔다. 연기를 잘할수록 오히려 공감이 가지 않은 역할인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저씨>에서 오나라가 연기한 정희는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굉장히 걱정됐어요. 정희가 가진 슬픔의 깊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됐거든요. 정희에겐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20년간 쌓아온 슬픔이 있잖아요? <나의 아저씨>를 준비하면서 정희의 그 깊은 슬픔을 표현하는 게 가장 큰 숙제였는데 보시는 분들이 그걸 알아봐주셔서 너무 감사하죠.”
많은 사람이 정희를 보며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밝지만 혼자 있을 땐 우울함이 밀려오는 사람, 오랫동안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이루지 못할 사랑에 애만 태우는 사람. 거기에 정희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면 그녀가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이틀 전 남자친구가 호프집에 갔는데 그곳 여사장님이 그러더래요. 요즘 <나의 아저씨>에 빠져 있는데 드라마 속 정희가 꼭 자기 같다면서, 가게가 끝나면 자기도 굉장히 외롭고 힘들다고. 혼잣말로 ‘나는 괜찮다’며 읊조리거나 자다가도 흐느끼며 우는 게 자기와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오나라는 요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장문의 편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아팠던 일들, 위로받고 싶은 일들이 주로 쓰여 있다고했다. 그만큼 <나의 아저씨> 속 정희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존재라는 방증일 것이다. 그런 정희가 극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내는 존재가 있다. 바로 ‘동훈(이선균 분)’의 엄마. 고두심이 연기하는 ‘변요순’과 정희가 연기 합을 맞출 때면 그것이 연기인 줄 알면서도 진짜인 것처럼 느껴졌다.
“고두심 선생님의 목소리 자체가 저를 울렸어요. 내공이라는 게 엄청난 거라는 걸 느꼈죠. ‘밥 먹어’ 한마디를 하는데도 아픈 마음을 쓸어내는 뭔가가 느껴졌어요. 극 중 동훈 엄마가 정희 몰래 겸덕이 있는 절에 다녀온 걸 들키는 장면이 있어요. 그 후 사실 정희가 우는 장면이 아니었는데 고두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속에서 묵직한 게 올라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어요. 작가님께서는 정희의 감정이 20년 동안 묵혀 있던 것이기에 어제 막 헤어진 것처럼 울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 순간의 감정에 집중한 거죠. 지금 생각하면 살짝 아쉬웠던 장면이기도 해요.”
지난 5월 2일, <나의 아저씨> 팀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휴식을 위해 2회 결방을 결정했다. 대신 그간의 이야기를 묶어 만든 코멘터리 영상을 내보냈다. 카메라가 꺼졌을 때의 배우들 모습과 NG 장면도 있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동훈 역할의 이선균이 오나라와 연기하다 말고 “잠깐만, 쟤만 보면 슬퍼”라며 연기를 잇지 못한 것이다.
“동훈이와 정희는 둘만이 공감하는 슬픔이 있어요. 동훈이 20년 지기 친구 이름을 정희 때문에 입 밖에 내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정희는 다시 겸덕이를 떠올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 서로를 생각하면 짠한 거예요. 그런 마음에 서로 바라보는 게 힘들어서 연기를 제대로 못한 순간이 몇 번 있었어요. 이선균 씨와의 장면은 그런 부분 때문에 더 애달프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극 중 정희와 ‘이지안(이지은 분)’은 같은 슬픔을 안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말 없이 옆에 잠시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이 위로된다. 그녀는 아이유(이지은)가 이제야 자기 몸에 꼭 맞는 배역을 맡았다고 기뻐했다.
“아이유는 정말 최고예요. 언니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죠. 저보다 연기가 뛰어나면 다 언니라고 부르거든요.(웃음) 저는 예전부터 아이유가 나이에 비해 뛰어난 감정 연기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요. 제가 아이유에게 ‘노래하는 게 행복해요, 연기하는 게 더 행복해요?’라고 물어봤더니 ‘연기하는 게 더 행복해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에 작품을 통해 또 만나게 되겠구나. 그땐 지금보다 더 속 시원하게 연기해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의 아저씨>에서는 ‘정희네’가 동네의 터줏대감 역할을 하며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친구들을 반긴다. 오나라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는지 궁금했다.
“있었죠. 남자친구가 청담동에서 15년 동안 ‘정희네’ 같은 바를 했어요. 사람들은 그곳을 제 남자친구 이름을 붙여 ‘OO이네’라고 불렀고요. 물론 바의 이름은 따로 있었죠. ‘정희네’처럼 주변 사람들이 편안하게 모일 수 있는 곳이었어요. 15년 동안 하던 그곳을 안타깝게도 접어야 했기 때문인지, 남자친구가 <나의 아저씨>의 ‘정희네’를 보고선 굉장히 슬퍼하더라고요. 자신의 청춘을 함께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던 공간이니까요. 저한테도 ‘정희네’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굉장히 아팠어요.”
많은 이가 자신에게도 ‘정희네’ 같은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친 하루 끝에 오래된 친구와 함께 맛있는 음식과 술 한잔을 기울이며 “인생 그거 별거 아니다”라고 속 빈 투정을 부릴 수 있는 곳 말이다.
“많은 분이 제게 ‘정희네’에 대해 물어봐요. 이선균 씨는 자기가 투자하겠다고 진짜 ‘정희네’를 오픈하라고 성화예요. 저희 사촌 오빠들은 진짜 제가 ‘정희네’를 오픈한 줄 알고 위치를 알려달라고도 했죠.(웃음)”
인터뷰 도중 오나라의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을 살짝 들여다보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발신자의 이름은 ‘참치뱃살’이었다. ‘아담이(오나라의 애칭)’가 인터뷰를 잘하고 있는지 걱정돼 문자를 보냈단다. 아무렇지 않게 남자친구의 문자를 소리 내어 읽던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 매니저를 쳐다봤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20대 때부터 사귄 지금의 남자친구와 여전히 열애 중이다. 함께 뮤지컬 공연을 하며 연인이 됐다는 두 사람의 만남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명성황후>라는 뮤지컬을 하면서 처음 남자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그 전에 저를 마주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대요. 제가 극단에서 표를 팔 때나, 휴대폰을 사러 매장에 갔을 때도 저와 마주쳤었다고 해요. 그럴 때마다 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었대요.
첫눈에 반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오나라는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답했고, 연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혹시 결혼을 안 하는 것이냐는 우문엔 결혼이 필요 없다고 현명하게 답했다.
“저희는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결혼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희 관계에 결혼이 딱히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인걸요. 저희에겐 지금 당장 결혼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함께 어떤 꿈을 꾸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거든요.”
<나의 아저씨>가 끝난 후 그녀는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 정희 캐릭터가 사랑받은 만큼 다음 작품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그녀는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그 작품이 자신의 ‘인생작’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아저씨>가 제 인생 작품은 아니길 바라요. 좋은 작품을 만나 계속 인생작이 경신됐으면 하죠. 그렇지만 특별히 큰 역할에 욕심을 내는 건 아니에요. 단지 연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행복이죠. 항상 작품의 한 부분으로 빛이 나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그런 걸 시청자분들이 좋게 봐주시고, ‘저 배우가 튀진 않지만 조금씩 자기 몫을 해나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해주시는 것 같아요.”
오나라는 감독과 작가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배우다. 지금까지 함께 작업한 많은 사람이 오나라가 인기를 얻게 된 것에 대해 당연한 결과라는 반응이다.
“전작인 <품위 있는 그녀>의 작가 백미경 선생님한테서 어제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오나라, 너 멋지게 잘해내고 있어’라고 적혀 있었죠. 보자마자 울컥했어요. 백 선생님은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에요. 든든한 분이죠.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그분께 그런 메시지를 받으니 큰 힘이 되더라고요. <품위 있는 그녀> 촬영 당시 저에게 그러셨어요. ‘오나라, 눈물 연기 좀 해봐야지?’ 그런데 이번에 <나의 아저씨> 하면서 정말 원 없이 눈물을 흘렸네요.
그녀는 최근 10년 동안 살던 구리시에서 하남시로 이사했다. 단지 집 앞에 대형 쇼핑몰이 있다는 단순한 이유였지만 이사는 그녀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인테리어를 하면서 특히 주방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넓은 식당 공간에 큰 테이블을 들여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싶어서라고했다.
“너무 바쁘게만 살았던 것 같아요. 이제는 친구들을 집에 자주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도 떨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얼마 후엔 제 15년 지기 팬클럽 친구들도 초대할 생각이에요. 뮤지컬 배우였을 때부터 좋아해주던 친구들인데 이젠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죠.”
정말 ‘나라네’를 오픈했다는 장난 섞인 말에 오나라는 소리 내어 웃었다.
쉬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있고 싶다는 오나라. 정희의 강한 헤어스타일 때문에 앞으로는 어떤 스타일의 헤어를 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이라는 그녀에게 대중의 뇌리에 정희가 강하게 박힌 건 배우 오나라 때문이지 헤어스타일 때문이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예쁜 정희가 가고, 대신 예쁜 나라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