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트 구로점 24번 계산대’는 권미순(47세) 사원에게 ‘행복’과 동의어였다. 비록 비정규직 캐셔(cashier)였지만 매일 출근할 수 있어 기뻤고,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아 살림에 보탤 수 있어 뿌듯했다. 그렇게 10년을 일했다.
비극은 지난 3월 31일 찾아왔다. 권 씨는 그날도 평소처럼 똑같이 “어서오세요” 상냥한 목소리로 손님을 응대했다. 열심히 바코드를 찍어가며 분주하게 계산을 했다. 하지만 밤 10시 32분, 갑작스럽게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그 자리에서 퍽 쓰러졌다. 10여 분 만에 도착한 119구조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근무 중 직원이 사망한 이번 사고를 두고 이마트와 마트산업노동조합(이하 마트노조)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마트노조는 구급차가 오는 10분 동안 생명을 살리기 위한 그 어떤 응급조치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유가족이 공개한 시신검안서에 따르면 권 씨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허혈성 심장질환에 의한 돌연사다. 유가족은 권 씨가 평소 앓던 지병은 없었다고 밝혔다. 안타까운 사망은 이에 앞서 같은 달 28일 남양주 이마트 도농점에서도 발생했다. 무빙워크를 수리하던 재하청업체 청년이 기계에 몸이 끼어 숨졌다. 마트노조는 최근 일어난 두 사고 모두 이마트의 근무 환경과 초기 대응 미흡에서 온 결과라며 이마트 본사에 공식 사과를 촉구했다.
노조 관계자는 “당일 매장에는 매장 관리를 전반적으로 담당하는 슈퍼바이저(SV)와 보안사원 등이 있었지만 심폐소생술(CPR)을 할 수 있는 안전 관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며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권 씨는 어떠한 응급조치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살릴 수 있었는데 이마트의 실수로 골든타임을 놓쳤다”라며 “마트 내 제세동기도 시행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방송을 통해 심폐소생술이 가능한 사람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속수무책이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마트 측은 초동 대처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반응이다. 이마트 관계자는 “사고 발생 직후 이마트 소속 SV가 119에 신고한 뒤 초동 조치를 시행했다”며 “심폐소생술과 제세동기는 의식이 있을 때는 할 수 없다. 당시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시행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권 씨는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 그 자리에서 이미 사망했고, 노조 관계자와 유가족이함께 CCTV를 확인한 결과 마트 내부 관리자의 초동 조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100여 명 출동해 마트 입구 막아
권 씨의 추모식을 둘러싸고도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지난 4월 2일 마트노조는 이마트 구로점 앞에서 사망한 권 씨의 추모식 및 이마트 규탄 행동에 나섰다. 일부 노조원들은 추모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오후 8시께 권 씨가 근무하던 24번 계산대로 향하던 중 이마트 관계자와 충돌했다.
노조 관계자는 “이마트 관리자들이 ‘이곳은 사유지니 들어오지 말라’ ‘집회하던 곳으로 돌아가라’ ‘추모는 아까 다 하지 않았느냐’며 참가자들을 막아 세웠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무리를 지어 가지도 않았고 손에는 추모의 마음을 적은 포스트잇만 들고 있었을 뿐인데 100여 명의 경찰이 물리적으로 마트 입구를 가로막았다”며 “10년 동안 함께 일하던 동료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기에 애통한 마음이 드는 것이 정상인데 이걸 제지하는 것을 보니 배신감이 든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당시 영업시간이었고 영업을 방해하는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해 경찰을 부르게 된 것이다”라며 “마트 내부에서 쇼핑을 하고 있던 고객들의 불편을 일으키는 요소가 될 수 있어 영업을 종료한 이후 평화적으로 모두가 나눌 수 있는 추모를 고려해달라는 뜻이었다”고 설명했다.
갈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급기야 이마트는 지난 4월 4일 김기완 마트산업노조 위원장, 전수찬 마트산업노조 수석부위원장 겸 이마트지부장 등 6명을 구로경찰서에 고소·고발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고소·고발을 진행한 것은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해당 안건을 두고 경영진이나 관계자들이 논의를 한 부분이기 때문에 당장 어떻게 할 예정인지 답변하기는 어렵다”면서 “고소 취하 여부에 대해 현재로선 변함없는 입장이다”라고 밝혔다.
일단 이마트는 4월 10일 응급처치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밝히며 한발 물러섰다. 노조 측 주장을 일부 인정하고 받아들인 셈이다. 이마트는 매장 내 응급 상황 대응체계 강화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외부 전문기관을 통해 심폐소생술 교육 이수 대상을 확대하고, 자동 심장충격기도 확대 도입키로 했다. 전 직원 대상으로 위급 환자 대응 방법과 구급장비 사용법에 대한 교육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날 마트노조도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알렸다.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마트에서 잇따라 발생한 사망 사고에 대해 규탄했다. 이 자리에는 김종훈 국회의원(민중당)도 자리했다. 마트노조는 기자회견을 통해 ▲ 고인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보상 ▲ 재발 방지 대책 및 안전관리 매뉴얼 수립 ▲ 고인의 산업재해 신청 협조 ▲ 매장 내에서의 동료들과 시민들의 추모 보장 ▲ 안전 업무에 대한 외주화 중단 ▲ 사고가 발생한 구로점 소속 직원에 대한 심리치료 등을 핵심으로 본사에 요구했다.
노조 관계자는 “신세계가 운영 중인 사업장에서 사망 사고가 잇따르는 것은 전반적인 안전관리 운영이 부실한 결과며 사고 대응 조치가 미흡해 발생한 인재 사고다”라며 “법망을 피해 서류로만 진행되는 안전교육, 소방교육은 중단되어야 하고 위험관리, 안전관리 부서를 책임지고 운영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정용진 부회장은 사태를 악화시켜 국민의 분노가 신세계를 무너뜨리기 전에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며 “부디 인간으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장직, 주 35시간 근무
신세계그룹이 대기업 최초로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지 5개월째로 접어들었다.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하던 ‘9 to 5’(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로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직원들의 삶에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사무직은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았다며 반기는 분위기지만, 현장직은 업무 강도가 너무 세졌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마트의 한 매장 직원은 “현장에서는 같은 일을 짧은 시간에 마쳐야 하니 거의 쉬지도 못하고 일하고 있다”며 “충분한 인력 충원 없이 시간만 줄어들면 힘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은 저임금 노동자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주장도 나온다. 최저임금 수준의 노동자들은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하고 조금이라도 더 벌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마트에는 현재 3개의 노동조합이 있다. 노조끼리도 근로시간 단축을 놓고 의견이 다르다. 이마트의 교섭 대표 노조인 전국이마트노동조합 측은 “근무시간이 1시간씩 줄었는데 임금은 줄지 않아 근로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라며 “시행 초기여서 일부 문제점과 미래 임금 우려 등이 있지만 회사 측과 협의해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마트노동조합은 주 35시간 근로제 시행으로 캐셔 등의 휴게시간이 줄어들어 노동강도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 제도는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무력화하려는 ‘꼼수’라고 주장했다. 인력 충원 없는 근로시간 단축은 무의미하며, 근로시간이 줄어들면서 퇴직금과 수당이 줄어드는 등 여러모로 불리하다는 것이다.
또다른 노조인 마트산업노조가 공개한 캐셔들의 ‘근무 스케줄 운영 가이드’에 따르면, 작업 준비·마감시간과 휴게시간을 쪼개 계산대 업무로 돌린 정황이 보인다. 대기시간인 유급 휴게시간은 30분씩 두 번에서 20분씩으로 줄었고, 준비·마감시간도 각각 15분에서 10분으로 줄었다. 전수찬 마트노조 이마트지부 위원장은 “결국 일찍 출근해서 준비하고 늦게 퇴근하라는 것으로, ‘공짜 노동’을 유도하고 있다”면서 인원 충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다. 이어 이마트 구로점의 캐셔인 권미순 씨의 죽음도 이런 대책 없는 근로시간 단축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마트는 “근로시간을 1시간 단축했음에도 소득은 더 증가하고 캐셔들의 휴게시간도 1시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며 “캐셔들의 계산대 근무시간은 6시간으로 업계에서 가장 짧다”고 설명했다. 이마트에 따르면 캐셔와 진열사원 등 전문직 사원들의 35시간 기준 월 소득은 158만2,000원으로 지난해 40시간 기준 월소득 145만원, 올해 40시간 기준 최저임금 157만3,000원보다 높다. 또한 근로시간 단축으로 계산대 근무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1시간의 휴게시간과 별도인 대기시간 일부가 감소한 것이라고 이마트는 덧붙였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과도기를 잘 넘기고 서로 ‘윈윈’할 길을 찾아가는 것이 관건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