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실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진면목이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 임수정은 후자였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매력적인 사람. 모두가 그녀에게 ‘동안 미모’라는 수식어를 제일 먼저 붙이는 게 아쉬웠다.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녀의 단단함에 반하게 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임수정이 영화 <당신의 부탁>으로 대중을 만난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 동네에서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32살 ‘효진(임수정 분)’이 죽은 남편의 아들인 16살 ‘종욱(윤찬영 분)’을 만나 엄마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동안 미모’의 대명사인 그녀가 엄마 역이라니 싶다가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분이 그런 생각을 하시겠죠? 저도 ‘어떻게 나한테 이런 역할을 제안했지?’라는 생각에 신선했어요. 엄마 역할이라서가 아니에요. 배우 임수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벗어난 역할이잖아요. 사실 엄마 역할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어요. 동안 이미지에 엄마 역할이 매치되지 않긴 하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갑자기 엄마가 된’ 설정에 설득력이 생긴다고 생각했죠.”
임수정은 데뷔 후 처음으로 엄마 역할을 맡았다. 물론 직접 아이를 낳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엄마는 엄마다. 언제나 처음은 낯설고 어색한 법. 아이가 있기는커녕 싱글인 그녀는 첫 엄마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몇 년 전부터 엄마 역할로 제안이 왔어요. 생각해보면 제 친구들은 이미 아이 엄마고 빠르면 30대 초반에 아이를 낳기도 하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극에서 효진이 “종욱이가 어릴 땐 몰랐는데 다시 보니까 오빠를 닮았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효진은 진짜 엄마가 되겠다는 마음보다 오빠의, 남편의 아들이라서 종욱을 데려온 거예요. 아들이 아닌 가족으로 데려온 거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렵지 않더라고요. 만약 직접 아이를 낳은 엄마 역할이었다면 어려웠을 것 같아요.”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의 아들과 가족이 되는 상황이라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이다. 현실로 가져와 생각해보자. 주변에서 말리는 것은 물론, 당사자도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효진은 기꺼이 종욱을 받아들인다.
“죽은 남편이 떠올랐을 수도 있겠죠. 그보다 16살인 종욱을 돌봐줄 어른이 없고, 저 아이도 나처럼 가족을 잃고 혼자구나라는 생각에 연민이 생겼을 것 같아요. 효진은 남편을 잃고 상실감을 느끼고 우울증에 걸렸어요. 큰 결심을 과감하게 하는 것도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라고 해요. 효진은 내가 저 아이의 엄마라는 생각이 없었을 거예요.”
결혼에 대하여
<당신의 부탁>에는 다양한 엄마가 나온다. 딸이 사위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게 못마땅한 효진의 엄마 ‘명자(오미연 분)’, 이제 막 출산하고 엄마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효진의 절친인 ‘미란(이상희 분)’. 16살이란 어린 나이에 예상하지 못한 임신으로 출산 후 입양을 택한 ‘주미(서신애 분)’. 그리고 입양으로 어렵사리 엄마가 되는 ‘서영(서정연 분)’까지, 그녀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엄마가 되고 자녀와 관계를 형성한다.
“전 엄마와 사이가 좋은 편이에요. 물론 사춘기 때나 20대 초반엔 엄마에게 짜증과 화를 내고 하면 안 되는 말을 하기도 했죠. 그 모습을 떠올려서 연기했어요. 아마 엄마가 보시면 얼굴이 빨개져서 핏대 세우고 얘기하는 모습이 똑같다고 하실 거예요. 어느 날은 오미연 선생님께 “저 실제로 엄마한테 이래요”라고 고백했더니 선생님이 “그게 딸이지.” 이러시더라고요. 지금은 엄마한테 잘하려고 노력해요.”
<당신의 부탁>은 엄마와 자녀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이 시대의 ‘엄마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나아가 혈연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가족도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영문 제목은 <마더스(Mothers)>예요. 다양한 유형의 엄마를 통해 엄마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조금 식상하지만 제게 엄마는 위대한 존재예요. 저희 엄마는 20대 초반에 저를 낳았어요. 제가 20대 초반일 때를 생각해보니 몸과 마음의 상태, 사회적 입지, 가치까지 어느 하나 완성된 것이 없더군요. 그런 시기에 부모가 된 거 잖아요. 저는 엄마처럼 희생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임수정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이 어떤 엄마가 될지 생각했다. 언젠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사회가 바라는 헌신적인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이 어떤 엄마가 될지 그리지 못했다.
“영화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어떤 엄마가 될지 고민했어요. 여성으로서 현실적인 고민이죠. 당장 결혼해 아이를 낳아야 엄마가 되는데, 제가 언제 결혼해 아이를 낳을지 알 수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아이를 낳아봐야 알 것 같아요. 다만 저희 엄마처럼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진 못할 것 같아요. 엄마의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정말 모르겠어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할래요.”
임수정은 결혼에 대해 아직까지 결정된 것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결혼해야겠다고 느낀 적이 아직 없단다. 나이 때문에, 주위 시선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싶은 인연이 생기길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결혼을 꼭 해야겠다, 혹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해요. 전 자연스럽게 이 사람과 결혼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할 거예요. 아직까진 그런 경험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평생 혼자 살겠다는 건 아니에요. 인연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흘렀을 뿐이죠.”
어렸을 땐 양손에 쥔 것을 모두 갖고 싶어 했는데 40대에 접어드니 버리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하나를 포기해도 삶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나이에 대하여
“뭔가를 선택한다는 건, 뭔가를 포기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당신의 부탁>에서 효진의 대사다. 영화 속 대사지만 곧 임수정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왜 나이가 들수록 그 말을 공감하는 거죠? 20대 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배우는 얼굴이 알려진 직업이니까 개인의 삶, 자유를 포기해야 돼요. 어렸을 땐 양손에 쥔 것을 모두 갖고 싶어 했는데 40대에 접어드니 버리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하나를 포기해도 삶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나머지 하나로 더 행복할 수 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함을 느끼니까 “그래, 안녕” 하고 포기하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덕에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임수정은 몇 년 전부터 크고 작은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면서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저예산 영화가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게 아쉬웠다. 좀 더 많은 이들이 개성 있는 영화를 보길 바라는 마음에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알려진 이들이 출연하면 조금이라도 더 주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빈과 함께 출연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2011)에 노개런티로 출연하고, 스태프들의 회식과 간식을 책임진 것도 모자라 제작팀의 일까지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된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사실 돈을 포기했어요. 하지만 감독님, 스태프 모두 창의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한 건 마찬가지예요. 당시 촬영을 시작하기 전부터 수익이 생기면 스태프들을 지원하기로 했었어요. 출연료는 없었지만 좋은 작품에 참여했고 그 작품으로 베를린영화제에 가서 레드카펫을 밟았어요.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얻었죠. 또 행복했으니까 그거면 됐어요.”
임수정은 호기심이 많다. 글을 쓰고 싶어서 작업실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기타를 치거나 꽃꽂이를 하고 요리도 한다. 때로는 지인들과 파티를 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그녀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들이다.
“작업실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에요. 정의하자면 제가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는 공간이에요. 영어나 기타를 배워요. 체질 때문에 채식을 하는데 음식에 제한이 많아 요리를 배우기도 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웃음) 이야기하다 보니 먹고 놀기만 하네요? 제가 쉴 때 배우고 싶은 게 많아요. ‘내가 이러려고 일하고 돈 벌지’라고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를 해요. 참, 글도 써요. 왜 글을 쓴다고 말해서 고생 중인지 모르겠지만 엉덩이를 붙이고 이것저것 쓰려고 하고 있어요. 최고의 영감은 마감이라는데, 마감이 생기면 진도가 나갈까요? 현재 서로 호감을 갖고 에세이 출판을 논의 중인 곳이 있어요. 좀 더 두고봐야죠.”
그녀의 호기심은 다채롭다. 기획이나 프로듀싱,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심을 두고 있고, 언젠가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진행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온실 속 화초처럼 차분하고 얌전할 것 같던 그녀, 참 다이내믹하다.
“제가 컨디션이 잘 회복되지 않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동물성 단백질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해서 채식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일본 교토에만 가도 채식 레스토랑이 많은데 한국은 채식 인구가 적어서 채식 요리를 즐기기 어려워요. 채식도 하나의 요리로 완성될 수 있고, 맛을 즐길 수도 있다는 맥락으로 다큐멘터리를 기획해보고 싶어요. 혹은 출연을 하든지.(웃음) 연출할 사람이 없다면 제가 해보겠다고 나설 수도 있고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 40대 중반이나 50대쯤엔 제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진행하고 싶어요. 첫 회 게스트는 존경하는 손석희 앵커님이에요. 첫 회에는 강한 분이 오셔야 되잖아요.”
영상을 통해 대중과 만나고 있지만 임수정은 음성을 매개로 한 매체를 좋아한다. 지난 2012년엔 성시경을 대신해 MBC 라디오 <음악도시>에서 특별 DJ를 맡았고, 지난 2016년부터 1년 넘게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에 출연하고 있다.
“팟캐스트는 요즘 최고의 기쁨이에요. 저는 아직도 사람이 많은 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가슴이 콩닥거려요. 배우를 오래 했는데 아직도 그렇다니 신기하죠? 내성적이라 그런지 저와 맞는 사람들하고 소소하게 하는 활동이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팟캐스트는 즐겁고 행복하게 하고 있어요.”
그녀는 팟캐스트 진행자로 활동하면서 영화 담당 기자의 고충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팟캐스트 진행을 위해 언론 시사회에 참석해 영화를 관람하는데, 언론 시사회 특유의 삭막한 분위기가 이제 이해됐단다.
“팟캐스트 때문에 언론 시사회에 가서 영화를 봐요. 그런데 얼마 전에 <리틀 포레스트> VIP 시사회에 초대받아 포토월에 섰는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어색한 거예요. 그래서 바로 <필름클럽> 단체 카톡방에 “저 이상해졌어요. 이제 언론 시사회가 편해요”라면서 메시지를 보냈어요. 취향과 별개로 평가를 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언론 시사회에서 웃음소리를 듣기 힘든 이유를 깨달았죠. <당신의 부탁> 언론 시사회 때는 두 번 정도 웃음소리가 들렸는데 그때 생각했죠. ‘아, 이 정도면 괜찮다!’ 하고 말이에요.”
임수정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서두르는 대신 천천히, ‘임수정스럽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