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장에서 오윤아는 크게 웃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처음 만난 스태프에게도 거리감 없이 대했고,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화통한 성격이었다. 레이싱 모델로 데뷔한 후 여러 방송에서 얼굴을 비추는 여배우가 되기까지 굴곡 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던 오윤아에게도 말하지 못할 속사정이 있었다. 그녀는 여자로서, 배우로서, 엄마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역할을 소화해오면서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털어놨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 오윤아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와, 곧 마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군살 하나 없어요.
특별한 스케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 운동해요. 오늘 화보 촬영을 앞두고는 더 열심히 했어요. 마음먹고 가기까지가 힘들지 막상 하고 나면 개운하고 기분 좋은 게 운동이에요. 여배우고, 여자니까 관리해야 하잖아요.(웃음) 마흔 살이 돼도 예쁘고 싶으니까요.
마흔을 앞둔 기분은 어떤가요?
스물아홉 살 때와는 다른 느낌이에요. 그땐 하루라도 빨리 서른 살이 되고 싶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멋진 40대를 맞을 수 있을지 고민해요. 괜찮은 어른, 괜찮은 여자, 괜찮은 여배우가 되고 싶은데 그러기엔 부족한 게 많아 걱정이에요.
마흔이라는 숫자가 주는 부담감이겠죠.
그동안은 나이에 연연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은근히 압박이 되더라고요. 최근에 지난 10년을 되돌아봤어요. 주인공보다 조연이 좋았고, 동경했던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기 때문에 욕심부리지 않았지만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더라고요. 30대 후반에 들어서서야 '마흔이 되기 전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는데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것 같아서 속상해요. 지금 탄탄하게 다져놓지 않으면 안정적인 40대를 보낼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예요. 40대엔 좀 더 진정성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자연스러우면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연기를 하는 여배우요.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던데….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걸 느껴요. 작품에서 매번 다른 느낌을 보여줘야 하니까 힘들죠. 예전엔 단순히 의욕만 넘쳤었다면 지금은 섬세하게 연기를 해내고 싶어 고민이 많죠. 배우는 그동안의 연기가 기록으로 남잖아요. 과거에 출연했던 작품을 다시 보면 연기를 너무 못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요.
레이싱 모델에서 배우로 전직했음에도 연기력 논란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어요. 다행히 그동안 함께 연기한 다른 배우들에게 잘 묻어왔죠.(웃음) 덕분에 제 부실한 연기력이 들통나지 않았을 뿐이에요. 다행인 건 좋은 선배들과 작품을 하면서 선배들의 연기를 보고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는 거예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고두심 선생님처럼 연기하고 싶어요. 선배님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진심이 전달되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연기를 하면 순간적으로 몰입돼 그냥 눈물이 나요. 대사를 툭툭 던져도 진심처럼 들리는 걸 보면서 '이런 게 진정한 배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로서의 욕심 말고 사람으로서의 욕심은 뭔가요?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마 지난 10년 동안 단련됐을 테니까 가능하지 않을까요?
지난 10년… 어땠는데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이 달려왔어요. 이른 나이에 결혼했고, 또 이혼해 싱글맘이 됐어요. 그러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연기하면서 풀었죠. 캐릭터에 몰입하는 순간만큼은 제가 아니니까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라도 쉬지 않고 일했어요. 일을 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거든요. 섭외가 들어오면 캐릭터나 장르를 따지지 않고 거의 다 출연했어요. 그게 결국 저를 지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말예요. 작년엔 특히 힘들었던 것 같아요. 늘 '쉬고 싶다'고만 생각했으니까요.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도 스트레스에 한몫했겠죠.
저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용감한 성격이고, 그에 따르는 책임도 씩씩하게 받아들이는 스타일인데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싱글맘, 워킹맘으로 사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아들은 발달장애가 있어요. 어려서부터 발육이 느렸고, 엄마를 정말 사랑하는 아기 같은 아이죠. 그런 아들을 혼자서 감당하며 키워야 하는 것도 힘들었고, 이겨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나는 왜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다 겪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 눈물만 나더라고요. 아이 앞에서도 많이 울었죠. 약해지고, 약해지다 보니 예민해지고, 예민해지다 보니 사소한 것에 집착하게 됐어요. 그런 저를 들여다볼 때마다 괴롭고 외로웠죠.
사람들에게 기대보지 그랬어요.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아요. 연예인 친구도 많고요. 그런데 그들이 해주는 위로가 사실 큰 위로가 안 되더라고요. 저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죠.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하는 거더라고요. 또 따지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믿었던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모두 저 스스로 치유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점점 속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됐던 것 같아요. 힘들고 슬픈 걸 견디는 것도 다 내 몫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하다가 집에 오고, 그런 시간이 반복될수록 공허함은 커져만 갔어요.
연기를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이가 아플 땐 내가 옆에서 보살피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차라리 장사나 할까?' 하고 생각했었죠. 매번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야'라는 생각으로 버텨온 게 지금까지 왔네요.
어떻게 마인드 컨트롤을 했나요?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기도했어요. 또 아이가 힘이 돼주었죠. 모든 엄마가 그렇겠지만 저는 특히 아들과의 시간 중 한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어요. 장애가 있음에도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아들을 보면서 '조금만 더 힘내자!'고 생각했어요. 아들은 열심히 자라주는데 엄마인 제가 무너지면 안 되잖아요.
아이 때문에 작품 선택의 기준이 바뀌기도 하나요?
아들이 TV에 나오는 저를 보면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그런 점이 작품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치진 않아요. 다만 아들이 아프기 때문에 '엄마'를 연기할 때 더욱 몰입이 되긴 하죠. 실제로 아이를 잃어버리고 다쳤던 경험은 작년에 출연했던 <언니는 살아있다> 속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오윤아는 어떤 엄마인가요?
바쁜 엄마예요. 아마도 아들은 저를 싫어할 거예요. 엄마랑 있으면 행복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은데 이혼 후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아들과 보낸 시간이 거의 없어요. 최대한 함께하려고 하는데 일하는 엄마가 노력해봤자 얼마나 많이 같이 보내겠어요. 아들이 출근하는 제 옷깃을 붙잡고 못 나가게 할 때마다 "엄마 일해야지"라고 말하고 매몰차게 집에서 나와요. 형제가 있었더라면 조금은 나았을 텐데…. 그럴 땐 동생을 만들어주지 못한 게 미안해요.
친정어머니가 육아를 도와주시나 봐요?
이혼 후부터 엄마랑 같이 살고 있어요. 사정상 일 년 정도 떨어져 지낸 적이 있는데, 할머니가 없으니까 아들이 불안해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같이 살게 됐죠. 아들에 대해 저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저희 엄마예요. 그래서 그런지 저보다 할머니가 더 좋대요.
아들은 오윤아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퇴근 후 집에 갔을 때 아들이 안 자고 있으면 "왜 안 자?"라고 타박하지만 속으론 내심 좋아요.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아들을 안고 자면 하루 피로가 다 풀리죠. 다음 날 아들의 컨디션도 훨씬 좋더라고요. 학교에 갈 때 제게 뽀뽀를 '쪽' 하고 가요. 이런 새끼가 있어 더 열심히 일하게 되죠.
워킹맘들에게 조언 한마디 해준다면요.
일하느라 자녀와 함께하지 못한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은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함께 있을 때만큼이라도 아이에게 충실하다면 아이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거예요. 그리고 엄마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이에게 자극을 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힘들었던 지난 시간은 분명 오윤아를 단단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돌이켜보면 그 시간을 견뎌왔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는 재산이 될 거라고 믿어요. 연기적으로도 성장했다고 느끼고요. 무엇보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빠지지 않고 잘 견뎌온 제가 기특하고 예뻐요.
오윤아가 왜 운동 마니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스트레스 해소법이랄까요.
정확해요. 너무 화가 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운동을 하면 해소가 되더라고요. 그 시간만큼은 운동에만 집중하니까요. 또 운동 후에 마시는 커피 한 잔도 제 스트레스 해소법이죠.
못하는 운동이 없죠?
무용에 접목한 운동인 탄츠플레이를 5년 정도 했어요. 테니스와 발레도 조금 할 줄 알아요. 최근엔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바닷가(울산)에서 자라며 생존 수영을 배워온 터라 물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금방 익힐 수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엔 속옷 브랜드 '오레이디'를 론칭했어요.
지인과 함께 2년 전부터 추진해오던 사업인데 이제야 론칭하게 됐어요. 원단부터 실 하나까지 직접 보러 다녔죠. 물론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제 이름을 건 브랜드를 내놓게 돼 뿌듯해요. 여자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싶어요. 여자의 의리, 여자의 사랑, 여자의 열정을 속옷에 담아내는 거죠. 소녀처럼 사랑스럽지만 쿨내 물씬 풍기는 당당한 여성이오.
사업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어려서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뭘 해야 할지를 몰랐어요. 멋 부리는 걸 좋아해 '의류 사업을 해볼까' 하다가 스타일리시한 브래지어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우연히 알게된 지인이 관심을 보이면서 급물살을 타고 진행됐어요. 지금은 백화점 팝업 스토어와 온라인으로만 판매하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에요.
연기하랴, 살림하랴, 육아하랴, 게다가 사업까지. 바쁘지 않아요?
작품 관련 미팅도 해야 하고, 브랜드 관련 일도 해야 하니까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너무 바쁘다 보니 내가 어제 한 일이 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예요. 그런데 바쁘니까 버틸 수 있는 것 같아요.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야 집에 가서 씻고 누웠을 때 아무 생각 안 하고 잠들 수 있잖아요. 생각이 많으면 우울해질지도 몰라요.
멋진 여자 같아요. 오윤아가 오윤아를 평가해본다면 어떤가요?
저는 불같은 여자예요. 열정도 많고, 매사에 활활 타오르죠.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따지고 계산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감정 표현도 솔직하게 하는 편이죠. 사람도 좋으면 이유 없이 좋아해요.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저는 재고 따지는 걸 못 하는데 인생을 계산해가면서 사는 여우 같은 사람이 부럽기도 해요.
이 인터뷰를 통해 도도한 외모에 대한 선입견이 깨질 수 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얼굴이라 그런지 저에 대한 선입견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저 생각보다 더 많이 소탈하고 털털해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려고 하고,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죠. 그런 성격이 제 재산인 것 같아요.
아마도 생각보다 더 멋진 마흔을 맞이하게 될 것 같아요.
30대에 잃었던 걸 되찾는 40대가 되고 싶어요. 실패했던 사랑도 왠지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고, 연기적으로도 도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 10년이 힘들었다면, 앞으로 10년은 행복할 일만 있겠죠? 힘들었던 지난 10년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할게요.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