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 2개월은 기억에서 지워질 만큼 힘들었지만 지금은 훌륭한 ‘한국 할머니’로 거듭나고 있다. 아기들 음식이 오가닉이냐, 철분은 충분히 들어갔느냐, 헬멧을 사서 씌우는 게 어떻겠느냐, TV 보여주지 말고 책을 읽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등등 일취월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쏟아지는 잔소리에 하우스메이트들은 한국말 ‘할머니’를 배워 “제발 할머닝(할머니+ing)을 그만두어달라”고 귀가 따갑도록 부탁하지만 “너 좋으란 게 아니라 네 자녀들 좋으라고 하는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들어간다.
내가 경험한 미국은, 특히 LA는 새 생명의 탄생에 무척 자애롭다. 철없는 고등학생이 아이를 낳든, 미혼모·미혼부가 아이를 낳든, 동성 커플이 아이를 입양하든지 간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혹은 누군가의 가족이 되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질시나 걱정이 아닌 축복을 내린다. 그래서일까, LA에는 아이들이 참 많이 보이고 또한 한집에 두서넛의 아이를 가진 가정도 쉽게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임신 소식이 전해지면, 임신부의 절친 혹은 자매 중 누군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베이비 샤워’를 위해서다. 주로 임신부의 친구들과 여성 친지들이 참여하는 이 파티는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미리 축하해주는 한편, 이미 자녀가 있는 사람들이 조언을 해주고 기저귀 등의 선물을 가져다주는 파티이다. 파티 게임도 기상천외하다. 새 기저귀 겉에 축하 메시지를 가장 웃기게 쓰기, 신생아 젖병에 든 맥주를 가장 빨리 마시기, 기저귀에 담긴 응가처럼 만든 초콜릿을 맛보고 종류 맞히기 등으로 초대 손님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지난 1년 동안 쌍둥이를 돌보며 미국의 육아용품 시장에 대해 느낀 감상은, 아이들이 방임에 가까운 자유를 일찍부터 배우리라는 것이다. 한국 지인들에게 들은 아이용 베개, 누빔 천으로 만든 헬멧, 압축 스펀지 바닥재 등 기본 중의 기본 용품마저도 쉽게 보이질 않는다. 젖병을 예로 들면, 안전한 소재를 사용한 제품인지보다는 부모가 얼마나 더 편하게 육아에 전념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광고가 대부분이다. 분유 역시 “필요한 건 다 들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을 뿐, ‘호르몬이 없는 우유로 만든 분유’ ‘오메가-3 추가’ 등 아이를 위하는 부모를 타깃으로 하기보다는 실용성에 중점을 둔 제품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패션 이야기로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유명 디자이너들과 대형 체인 마트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아동복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센스 넘치고 패셔너블한 제품이 1만원가량에 팔린다. 패션에 관심 있는 지인이 “샤넬의 작년 봄/여름 시즌 드레스와 판박이”라든가 “디올의 클래식 디자인”이라며 보내준 링크에 보인 제품은 유명 아동복 회사의 세일 제품으로 각각 2만원가량이었다. 또한 유명 브랜드에서 나오는 임부복, 기저귀 가방, 20세기 모더니즘 스타일로 디자인된 아기 의자 등을 대체로 저렴한 가격대에 쉽게 구할 수 있다.
어느 나라든지 현대사회에서 육아가 지니는 의미는 같다. 사회의 구성원이 될 재목을 키워내는 과정은 사회가 추구하는 바를 극명히 보여준다. 재미에만 치중한 장난감과 동시에 교육용 장난감도 불티나게 팔리고, 부모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할 수 있는 패셔너블한 아동복도 있으며, 아이들에게 매일 책을 읽어주고, 대화하고, 노래를 불러주라는 공익 광고도 나오는 이곳은 방임에 가까운 자유라는 테두리 내에서 스스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엿보인다. 탄생을 모두가 축복해주는 곳, LA는 밤낮으로 자라나는 중이다.
글쓴이 척홍(@chohng)
미국에서 나고 한국에서 자란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또한 예술 작가로 일하고 있다. 음식을 좋아해 취미는 요리하기이며, 이것저것 특이한 물품을 모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