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나훈아!"
3천5백 석을 꽉 채운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홀. 11년을 기다린 팬들이 큰 소리로 외치자 장막이 걷히며 어쿠스틱 기타를 어깨에 멘 나훈아가 앉은 작은 무대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조명은 흰색 셔츠를 입은 나훈아만 비췄고 커다란 박수 소리로 채워진 공연장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그가 첫 곡으로 선택한 노래는, 동요 '반달'.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그에게만 비춘 단 하나의 조명에서 목소리에만 집중해달라는 그의 의도와 마음이 느껴졌다. 잔잔한 어쿠스틱 반주로만 이루어져 오직 나훈아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실제로 숨죽여 듣던 팬들도 하나둘 노래를 따라 했다. 그 뜨거운 이슈를 몰고 다녔던 나훈아 콘서트의 베일이 벗겨진 순간이었다.
첫 곡이 끝나고 인사 없이 곧바로 노래가 이어졌다. 지난여름 발표한 새 앨범 <남자 이야기>에 수록된 신곡과 인기곡으로 구성됐다. '홍시' '아이라예'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등 레퍼토리마다 화려한 무대와 가창력을 선보였고 팬들은 열광했다. "왜 아무 말을 안 하고 노래만 하느냐"며 낯설어하던 관객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노래를 따라 부르는 등 돌아온 나훈아의 공연에 빠져들었다. "잊으라 했는데/ 잊어달라 했는데"로 시작하는 인기곡 '영영'을 부를 때는 열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무대는 화려했다. 남녀 혼성으로 이뤄진 댄서팀과 만드는 무대는 물론이고 오케스트라와 밴드가 혼합된 사운드 세팅도 돋보였다. 비디오 아트와 LED 조명, 불꽃 등 다양한 아이템을 활용한 화려한 무대는 나훈아가 직접 연출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눈길을 끌었다. 오랜 시간 음악과 떨어져 지냈지만, 그는 아이돌 못지않은 음악적인 감각과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얼굴 찡그리고 살기에는 인생이 짧습니다. 확실하게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미안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노래를 이어가던 그가 약 10곡을 마치고 건넨 첫마디였다. 쑥스러운 듯 민망한 듯, 특유의 미소와 손짓을 해가면서 팬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전성기 시절과 다름없었다.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지구 다섯 바퀴 돌았다"
잠정 은퇴를 선언한 기자회견 이후 11년 동안 이혼 소송부터 건강 이상설까지, 수많은 풍문을 뿌려온 그다. 이 공연이 뜨거운 이슈가 된 것도 그 때문이고 이날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관심 역시 그가 어떤 말로 그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낼지였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나훈아는 가수답게 말이 아닌 노래를 준비했다. 자작곡 '예끼 이 사람아'를 소개하면서, "1절은 팬들이 저(나훈아)를 질책하는 내용이고 2절은 저의 마음을 솔직하게 담아 부르겠다"는 말을 자막을 통해 전했다.
'소식 한 번 주지 않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코빼기도 볼 수 없고/ 이 몹쓸 사람 오랜만일세'(1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요'(2절)
노래를 부르자 객석에서는 웃음과 박수가 쏟아졌다. 그리고 "괜찮아!"라는 연호가 이어졌다. 이날 공연에서 나훈아는 몇 번이나 울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칩거하는 동안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지구 다섯 바퀴를 혼자 돌았다"는 그는, 미국에서 차로 이동하던 중 우연히 한인 라디오에서 흐르는 자신의 노래 '사나이 눈물'을 듣고 펑펑 울었다는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날 공연에서도 이 노래를 부르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고, 노래를 잠깐 잇지 못해 팬들의 격려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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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래를 11년 굶었다"는 나훈아는 "여러분이 괜찮다 하면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것 저 구석에 처박아두고, 얼굴 두껍게 해서 내 오늘 알아서 할 낀게~ 밤새도록 할 낀게~"라면서 팬들의 마음을 휘어잡으며 '원조 오빠'의 면모를 보였다. 경상도 사투리로 전한 입담도 빛을 발했다. "내 별로 안 늙었지요?" 하면서 관객을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더니 "우짜다가 이리 늙었노?" 하며 오래된 친구 대하듯 농담을 던지며 팬들을 '조련'하기도 했다.
"공연장 로비에서 판(최근 발매한 신보를 비롯한 베스트 앨범 CD)을 판다카데~. 공연 푯값도 비싼데 고마 보기만 하고 모른 척하고 지나가이소. (스태프를 보면서) 그런데 뭐라꼬? 아, (객석을 보면서) 여기서 사면 시중보다 15% 싸다 카네예"라면서 음반 홍보도 확실하게 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관객들은 "하나도 안 변했다" "역시 나훈아!"를 외치며 공연을 즐겼다.
공연은 게스트 없이 그 혼자 2시간을 꽉 채웠다. 한복을 입은 화려한 퍼포먼스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후 그는 관객들에게 큰절을 하고 감격에 젖은 얼굴로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나훈아 자신도, 팬들도 감동한 순간이었다.
나훈아는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 가요계의 전설' '살아 있는 공연의 지존'이라는 수식어를 스스로 입증했다 서울 공연을 마친 그는 12월 대구와 부산에서 두 차례의 공연이 남아 있다. 11년의 시간 동안 '얼굴 찡그리고 살기엔 인생이 짧다'는 단순한 명제를 깨달은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공연장 밖 이야기
1 첫 공연이 열린 11월 3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 주변에는 재미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공연 시작 시간은 오후 7시였지만 4시간 전부터 이곳은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공식 팬클럽 '나사모(나훈아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은 전날 플래카드를 내걸고 나훈아의 귀환을 반겼다. 주로 50대 이상의 연령층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2 이번 공연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서울·대구·부산 공연 티켓 3만1천5백 장이 모두 팔려나갈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티켓 가격은 12만1천~16만5천원인데 인터넷에서 1백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으로 거래되면서 각종 사기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이날 공연장 앞에서는 암표상들이 1층 객석 티켓을 한 장에 40만원에 팔기 위해 호객 행위를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3 공연장 내부 촬영을 금지하기 위해 입장 관객 한 명 한 명의 휴대전화 렌즈에 보안 스티커를 부착했다. 공연 사진과 영상을 공유하면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기에 진행된 일이지만, 아이돌 가수 공연에서도 등장하지 않은 스티커에 "이 공연이 얼마나 대단하기에"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