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tvN 드라마 <하백의 신부>가 끝난 다음 날 만났다. 신세경은 젖살이 빠져서인지 지난해보다 더 날씬해 보였고, 감기에 걸려 자주 콜록거렸다. 연일 계속된 인터뷰에 지쳐 보이는 그녀에게 가벼운 질문부터 했다.
“촬영이 끝나니까 긴장이 풀리더니 감기에 걸렸지 뭐예요. 인터뷰하는 내내 기침이 나와서 혼났어요. 살이 조금 빠졌는데, 티가 많이 나나 봐요. 보는 사람마다 살 빠졌다고 하네요. 다이어트요? 체중 조절을 위해 식단 관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리에 관심이 생겼을 정도예요. 먹는 걸 워낙 좋아하니까 삶의 큰 재미 중 하나를 잃고 싶지는 않아서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먹기 위해 시작한 게 요리예요. 가장 자신있는 요리가 들깨수제비 하나라는 것만 빼면 아주 완벽하죠.(웃음)”
신세경은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스물여덟, 청춘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녀의 단발머리가 상큼했다. 얼굴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찰랑거리는 갈색 단발머리가 잘 어울렸다. 긴 생머리만 고수하던 그녀에게 단발머리는 도전이었고 용기였다.
“이번 작품의 캐릭터가 신경정신과 의사인 데다 제 실제 나이보다 많은 30대라서 평소와 다른 간결한 느낌을 원했어요. 헤어스타일리스트가 단발머리를 해보는 건 어떻냐고 제안했죠.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스타일이라 처음엔 5cm, 그다음엔 3cm, 그다음엔 1cm를 자르는 식으로 여러 번에 걸쳐서 잘랐어요. 단발머리가 어울릴지 걱정도 있었지만, 변화를 즐기지 않는 성격이라 단번에 싹둑 자를 용기가 없었던 거죠.”
반응은 걱정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신세경 단발’이라는 연관 검색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뜨거웠다. 신세경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사그라드는 게 아쉬운지 연신 한숨을 쉬었다.
“긴 머리일 때는 몰랐는데, 단발로 자르고 보니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편이더라고요. 짧게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어깨 기장을 넘었죠. 지금보다 더 짧은 단발을 해보고 싶기도 한데 고민이에요. 한 번 더 단발머리로 자르려면 또 한 번 용기를 내야 하니까요.”
도전과 변화에 익숙해야 하는 배우인데도 헤어스타일 하나 바꾸는 것마저 며칠을 고민한다. 그만큼 그녀는 익숙한 것이 편하고 새것보다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건 배우로서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기자의 말에 신세경은 크게 동감했다.
“저는 쓰던 물건을 계속 쓰고, 가던 길로만 갈 정도로 변화를 주저해요. 새로운 걸 쉽게 받아들여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에는 도움이 안 되는 성격일 수 있죠. 그래서 어릴 때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고 연기하는 게 두렵기도, 힘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연기 생활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성격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만약 배우가 아닌 다른 직업이었다면 영원히 우물 속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죠.”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약 15년을 한 소속사와 함께 일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게다. 새로운 곳에 가면 그 조직의 룰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해 잘 몰라서 생기는 오해나 갈등도 겪어야 할 테니까. 무엇보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원하는 걸 척척 알아챌 정도로 가까워진 소속사 사람들과 이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단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인맥 욕심이 없어요. 처음 만나는 사람과 서로를 알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트러블이 생기기 마련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못 견디거든요. 그래서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내 사람들에게 더 잘하자’는 게 제 마인드예요.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사람들과는 트러블이 발생할 일이 거의 없잖아요. 제게 그들은 항상 단단하고 든든하고 또 고마운 사람들이거든요. 가족도, 친구도, 소속사 식구들도요.”
목소리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녀가 부리는 가장 큰 욕심은 역시 사람의 마음이다.
“3~4년 전쯤이에요. 사람 관계에서 오는 상처 때문에 힘든 시기였어요. 어려서부터 활동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는 게 잘못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다 보니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고요. 의문이 들어도 바로 확인하지 못하고 혼자서 고민하고 갈등했어요. 그때 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진심은 그냥 통하기 마련이라고 믿었던 제가 바보였어요.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그런 고민이 결국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 거였다. 일에서 얻는 성취감보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받는 감동이나 사랑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그녀에게 낮은 시청률보다 괴로운 건 흐트러지는 인간관계였다.
“제 나이가 그런가 봐요. 사람들은 어른으로 보는데 실제 저는 아직 어리고, 이룬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멀죠. 그렇다 보니 외로워지고, 외로운 감정이 쌓이면 결국 사람들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더라고요. 제 감정의 바이오리듬을 분석해봤어요.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은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좋을 때죠. 상대방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을 때 크게 상처받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 저를 가장 힘들게 해요. 일의 성과보다는 친구, 가족, 연인과의 관계가 좋으면 더 큰 행복을 느껴요. 작품이나 연기가 제게 명예와 지위를 주고, 덕분에 돈과 인기를 얻고 보람도 느끼지만 그것들은 금방 꺼지는 불꽃 같아요. 하지만 옆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 불꽃이 꺼졌을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렇듯 상처에 민감하고 변화가 두려운 그녀가 배우로서 변신에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다. 작품 속 캐릭터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나와 다른 캐릭터를 체화하고 나면 ‘그게 나니까 문제없다’는 식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하백의 신부>를 촬영하는 중에는 완전히 ‘소아’(캐릭터 이름)가 되는 거죠. 자연인 신세경으로 사는 시간보다 ‘소아’로 사는 시간이 많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소아’가 되어 있어요. 물론 처음엔 어려웠지만 이제는 캐릭터를 체화하는 노하우가 생겼어요. 사람들이 ‘남주혁 씨와 키스신 찍으면서 진짜 심쿵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봐요. 물론 연기가 아닌 실제였다면 그런 달콤한 말들에 심쿵했겠지만, 그 상황에서 저는 온전히 ‘소아’였으니까 헷갈리지 않았어요. 연기가 끝나고 나면 사랑에 빠진 ‘소아’가 아닌 자연인 신세경으로 돌아오니까요.”
남주혁과 약 6개월간 로맨스를 찍었는데 어찌 헷갈리지 않을 수 있느냐고 타박했다. 진짜 사랑에 빠져도 모자란데 말이다.
“저희는 다 프로니까요.(웃음) 온전히 캐릭터화되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실제의 나를 분리하면 감정에 젖지 않을 수 있어요. ‘이건 연기다’ 하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거죠. 개인적인 감정을 쓰는 직업이 아니라 ‘액팅’을 하는 사람이니 진짜로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실제와 연기를 분리하지 않으면 배우는 불행해져요. 자기만의 영역을 확실하게 만들어두어야 하죠. 이번 작품은 로맨스물이니까 괜찮았지만, 사이코패스 역할을 맡았는데 실제와 연기를 혼돈해버리면 큰일나지 않겠어요?”
작품 속에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이 가진 특권이 아니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신세경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작품을 하면서 상대 배우와 진짜로 사랑에 빠진다거나, 실제로 연애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사랑에 빠진 순간의 아름다움을 연기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배우로서 보람된 일인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은 ‘사람들은 어떤 힘으로도 살아요. 그게 사람이면, 사랑이면 더 좋겠죠’라는 ‘소아’의 내레이션으로 드라마가 끝나요. 아빠에 대한 증오와 그 고통을 원동력으로 살아오던 ‘소아’가 ‘사랑’이라는 삶의 원동력을 찾게 된 거죠. ‘사랑’이라는 정서를 대사와 표정 등으로 전달하면서 시청자들에게 밝은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실제로 나의 원동력도 사람이고 사랑이라서 크게 공감할 수 있었고요.”
새로운 걸 쉽게 받아들여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에는 도움이 안 되는 성격일 수 있죠.
로맨스에 대처하는 그녀의 방식이 어떤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노하우는 아니다. 지난 15년이라는 시간이, 10편이 넘는 작품이 그녀를 ‘배우답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 감정이 아닌,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에요. 저는 어려서부터 ‘이건 연기야!’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왔고 그래서 실제와 연기를 구분하는 능력이 빨리 생겼죠. 어떤 감독님, 어떤 작품을 만나느냐에 따라서도 감정의 기복이 달라지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80명 가까운 스태프가 있고, 장비가 세팅되고, 그 가운데서 ‘액션!’ 소리에 맞춰 연기해야 하는데 내 자신의 감정을 넣어서 연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카메라가 돌아가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닌 극 중 인물이 되어야 하죠.”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캐릭터에 집중하는 것, 연기에 사사로운 실제 감정을 투영하지 않는 것, 작품 앞에서 진지해지는 것이 그녀가 아역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15년간 쉼 없이 연기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기자의 칭찬에 신세경은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잘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감독님이, 작가님이 찾아주셨기 때문에 걱정 없이 연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20대 초반 인터뷰를 봤더니 당시에 대체 뭘 고민했는진 모르겠지만 ‘쉬고 싶다’는 말을 했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배부른 소리였죠.(웃음)”
초등학생 때 데뷔했으니 제대로 된 학창 시절을 누려보지도 못했을 테고, 어른들의 지휘 감독하에 감시당하듯 연기했으니 제대로 된 사랑도 해보지 못했을 게다. 스무 살 신세경의 불평불만은 어쩌면 당연했다.
“일찍 데뷔하긴 했지만, 중·고등학교 때는 일이 많지 않았어요. 다행히 학교를 빼먹지 않고 잘 다닐 수 있었죠. 20대에 접어들면서 일이 많아졌고 삶의 여유라곤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인데도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죠. 촬영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엔터 비즈니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잘 몰랐으니까요.”
스물두 살의 신세경은 갑작스럽게 어른이 되면서 귀여운 아역 배우에서 성인 배우로 가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다행인지 운명인지, 그 시절 ‘베이글녀’라는 신조어가 탄생했고 그 대열에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아역 배우 이미지는 없어졌다.
“사람들은 이미지 메이킹이 잘됐다고 말하는데 저는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잘 넘어간 것 같아요. 이미지라는 게 회사에서 바꾸려고 한다고, 또 배우가 바꾸려고 한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잖아요. 시간이 흐르고,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저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도 바뀔 거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조금 슬프고 어두운 지금의 제 이미지를 깨려고 노력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많은 작품에서 그래왔기 때문에 어두운 이미지가 생긴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현재 이런 이미지니까 다음 작품은 저런 캐릭터를 해야지’ 하면서 작품을 선택한 적은 없어요.”
시간이 흘러 신세경은 지금의 신세경이 됐다. 귀엽기만 하던 앳된 소녀가 어엿한 숙녀가 됐고, 촬영 현장에서 줄곧 막내였던 그녀가 이제는 선배 배우로 통한다.
“요즘 들어 새삼 나이를 먹은 것이 실감이 나요.(웃음) 스물여덟 살이 되니 배우들뿐 아니라 스태프들도 동생이 많아졌더라고요. 신기했어요. 어릴 때부터 일하다 보니 항상 막내였는데, 조금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더라고요. 이전까지 한 번도 언니의 입장, 선배의 입장에서 뭘 해본 적이 없어 촬영 초반에는 ‘동생들에게 뭘 어떻게 해줘야 하지?’라고 고민을 했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런 고민을 했던 것이 창피해질 정도로 동생들 모두 알아서 잘하더라고요. 모두 성실한 배우들이었던 거죠.(웃음)”
한 시간 남짓한 수다 끝에 얻은 결론. 그녀는 화려한 ‘스타’보다는 고민하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