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40대 후반의 여성입니다. 결혼 전에는 괜찮은 직장에서 전문직으로 일했고, 결혼과 동시에 17년째 가사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일류대와 MBA 출신으로 자아가 굉장히 강한 사람입니다. 아이들 앞에서 번번이 무시하는 말투로 이야기하고 계속 저에게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제 탓을 합니다. 자기식대로 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해병대 교육을 보내자는 둥 외국 기숙학교에 혼자 보내자는 둥 애들이나 제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생각만을 고집합니다. 집안일 좀 도와달라고 하면 "네가 나가서 돈 벌어봐라"라며 핀잔을 줍니다. 또한 중학생이 된 아들은 게임만 하고 야단치면 소리 지르고 짜증만 냅니다. 아들과 대화하기도 힘들고, 남편도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절 무시하며 제 탓만 하니 너무 화가 납니다. 만사 의욕이 없고 우울증도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근영
질문자님 남편의 행동은 자수성가한 가장이 자기 가족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나쁜 실수의 종합판처럼 보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일은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질문자님이 담당하는 육아와 가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군요. 이유는 자기가 직장에서 겪는 문제들은 자신과 같은 유능한 사람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지만, '살림하며 애나 키우는 일' 따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 결과 질문자님의 의견이나 생각은 번번이 무시하고, 자연히 자녀들도 어머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훈육이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악순환이 반복되며 모든 상황이 더 나빠질 겁니다. 남편은 더욱더 질문자님을 무시할 것이고 자녀들은 더욱 엇나가겠죠. 질문자님이 경험하는 우울감은 뇌가 오래전에 이런 현실을 인식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질문자님이 좋은 엄마 혹은 좋은 아내가 되기를 포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자님이 계속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면 악순환도 바뀌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악순환이 계속되면 어차피 좋은 엄마의 역할은 못 하게 됩니다. 남편이 문제에 직면할 수 있도록, 자녀 교육과 훈육이라는 것이 회사 일처럼 간단히 해결하고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인내심과 관심이 필요하며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양육'이라는 과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부부가 먼저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계속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도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편에게 교육의 권한을 일임하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영옥
아들과의 대화가 어려운 건 아이의 성격 문제도 있겠지만, 사춘기 시절이 지니는 난폭성과 특이성에도 기인합니다. 이 무렵 엄마도 갱년기에 돌입해 신체의 여러 가지 균형이 깨지거든요. 사춘기 아들과 갱년기 엄마의 마찰은 호르몬과 호르몬의 대격돌인 셈이죠.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우울증이 더 깊어질 것 같아 걱정이고요. 경제적인 문제가 없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남편분의 스펙은 17년이나 살아온 부부 사이에 전혀 중요한 이슈가 아니에요. 우리가 대단히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소위 스펙이 좋으면 자존감도 높을 것이란 오해죠. 하지만 자아가 강한 것과 자존감이 높은 건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의대나 외고 나온 사람들의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내부 경쟁이 심한 구성원들의 자존감이 바닥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과학고, 명문대 학생들이 성적을 비관해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건, 고갈된 자아를 어디선가 채우지 못해 그런 거예요. 남편분이 아내분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건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만 높아서 그런 것으로 보이고요. 더구나 자신의 불행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큰 이들은 사람을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심리가 강해 대개 주위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만듭니다. 남편분이 공격한다는 "너도 나가서 돈 벌어봐!"라는 말은 정확히 거울처럼 반사해 얘기할 수 있는 말이에요. "너도 여기서 아이랑 딱 붙어 살림만 해봐!" 같은 수준의 말인 거죠. 그건 논리도, 주장도, 뭣도 아닌 그냥 헛소리입니다.
제가 보기에 사연 주신 분의 자존감이 너무 많이 떨어진 상태예요. 좌절당한 욕구가 쌓이면 무기력증이 오고요. 그게 우울증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신체 나이 역시 갱년기에 진입했기 때문에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권하고 싶은 건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대개 자녀나 남편과 문제가 있는 분들에게 얘기해드리는 건 '거리감 유지'입니다. 사랑하고 아낀다고 해서 꽉 끌어안고 있으면 정작 상대방의 얼굴을 못 봅니다. 그 사람이 숨 막혀하는지, 슬픈지, 우울한지, 기쁜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오히려 사랑이 사람을 숨 막히게 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메커니즘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거리'는 중요합니다. 글쓰기가 그런 거리감을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치유 효과도 있고요.
Q 30대 후반 여성입니다. 결혼한 지 5년 됐고 아들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전문직인 남편과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평범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결혼 전 꿈꾸던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결혼 전 연기를 배웠고, 댄스 동아리 활동과 미인대회 출전 등의 활동을 했으나 엄격한 부모님 때문에 평범한 교직 생활을 하다가 결혼 후 육아에만 전념하며 지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며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 남편인데요,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이라 말도 못 꺼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집안일을 하다가 문득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증까지 생기려 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남편 몰래 뭘 시작해 보려고 해도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고 가능할지도 의문입니다. 제 얼굴이 눈에 띄게 예쁘지는 않아서 성형수술도 고민 중이고요. 남들이 볼 때는 늦은 나이에 아줌마가 왜 저러나 싶겠지만, 저는 더 늦기 전에 실패하더라도 제 꿈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장근영
모든 도전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단, 그 방법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타당한 것인지, 그리고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도전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마련이니까요. 일단 질문자님은 자신의 의사를 남편에게 명백하고 강력하게 표현하지 않은 듯합니다. 지나가는 말로 슬쩍 뜻을 비친 적은 있지만 자신의 의지에 대한 남편의 의견이나 태도를 확실하게 확인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보내주신 글을 봐서는 남편이 질문자님의 의지를 무시하거나 억누를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밝히고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질문자님도 그 일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요? 연기자 일을 새로 시작하겠다는 결심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슬쩍 찔러볼 문제가 아니라 확고하게 뜻을 밝혀야 할 일이죠.
제 생각에는 우선 검토와 준비 과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결혼 전에 연기를 배우셨으니 그 분야에 대한 기초 정보는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인맥은 어디서 찾을지에 대해서도 보통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요. 우선 그런 지식을 활용해 진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관련 전문가나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보세요. 증거와 정보를 쌓아놓고 냉정하게 판단한 다음에 남편에게 확실하게 뜻을 밝히세요. 자신의 결정이고 그 책임도 자신이 지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하면, 남편도 정말로 진지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일 겁니다.
성형수술 문제는 본말이 전도된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띄게 예쁜 사람만 배우를 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연예계 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좋은 배우가 되려면 우선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자기만의 기술을 숙련하는 것이 가장 먼저일 거라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정말 배우가 된다면 조연이나 단역부터 시작해야 할 텐데, 성형이 그 단계에서 오히려 방해가 될 가능성도 있고요. 그렇다면 성형은 연기자의 길을 준비할 때 가장 나중에 고려할 문제가 아닐까요? 배우가 되고 싶어 성형을 하고 싶은 건지, 성형하고 싶은 마음이 그냥 허영심이 아니라는 걸 변명하기 위해 연기자 일을 떠올린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모쪼록 숙성된 삶의 향기와 고유한 개성을 갖춘, 눈에 띄는 신인 배우의 등장을 기대해봅니다.
백영옥
일단 이 사연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배우에 대한 자신의 꿈이 얼마나 간절한지에 대한 것인데요, 무엇이 되고 싶다면 누군가와 상의하기 전에 구체적인 정보부터 수집해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배우에도 종류가 많으니 영화라면 영화판, 연극이라면 연극판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고요. 예쁜 얼굴에 대한 코멘트는 적당치 않은 것 같아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연기력이라면 좀 다른 문제죠. 나에게 배우가 될 만한 '연기력'이 갖추어져 있는지, 그것에 대한 노력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하다못해 연기 학원에라도 등록해서 지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만한 데이터도 필요하고요. 매우 현실적으로 접근하셔야 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가부장적인 남편분의 반대가 이 일을 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남편이 내 인생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니고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 사는 것만큼 '나'로 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저는 꿈은 꾸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그것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이 선행돼야 한다고 봅니다. 30대 후반이라고 했는데요, 제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이런 사연이 10대와 20대 학생들에게서 참 많이 옵니다. 나이대와 극렬히 반대하는 대상이 부모님이라는 점에서 다를 뿐이죠. 그때마다 제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정말 확실하게 구분하고 가야 합니다. 진짜 '연기'가 절실히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유명 배우의 화려한 삶을 '동경'하는 것인지 말이죠.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인 경우가 많아요. 망하는 지름길이죠. 운이 좋아 배우가 된다 해도 반짝 스타에 그칠 거고요. '전자'가 기본인 사람들은 수백 번 오디션을 견디며 마침내 배우의 꿈을 이루기도 하고, 무수히 많은 단역을 한 끝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끝내 배우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겠죠. 하지만 매 순간 자신의 꿈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 사람의 실패를 저는 결코 실패라고만 보지 않아요. 그것 자체가 위대한 도전인 거죠. 오디션에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바로 그 순간만큼은, 나는 진짜 배우인 거니까요.
✽고민이나 사연은 deuxism100@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장근영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심리학자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한다. 아내, 고양이 세 마리와 동거 중. 저서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 심리학>.
백영옥
패션지 피처 에디터로 일하던 중 소설가가 되고자 과감히 퇴사 감행. 2006년 소설가로 등단 후 글 노동자라 자처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 <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 <소울 푸드> <다이어트의 여왕> <스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