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의 멜리호보 집
모스크바 남쪽 멜리호보에 있는 ‘체호프의 집’은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다. 대지가 꽤 넓어 이곳을 영지라고 부르는 이도 있는데,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1904)는 벼슬을 한 일도 없고 그 땅은 나라에서 하사 받은 땅도 아니므로 영지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체호프의 집’이라고 부르면 좋을 듯하다. 집은 아담한 단층이다. 저택이라고 할 만큼 크지 않다는 얘기다.
우리식으로 쉽게 말하면 밭도 있고 작은 과수원도 딸린 널찍하지만 소박한 전원주택이라고 할까? 톨스토이의 야스나야 폴랴나 영지는 워낙 커서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체호프의 멜리호보 땅은 우리 기준으로 볼 때 크긴 좀 하지만 톨스토이의 영지에는 비할 규모가 못 된다.
이곳은 체호프가 시베리아에 다녀온 2년 후인 1892년, 가족들과 살기 위해 그동안 번 돈으로 사들인 땅이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가족들이 흑해 연안의 고향에서 모스크바의 빈민가로 이주해 어렵게 살았던 탓에 널찍한 땅을 가진 주택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고 한다.
입구 쪽은 밖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철제 울타리로 되어 있다. 처음 보이는 건물은 가끔 연극이 공연되는 아담한 규모의 소극장이다. 극장 앞 정원에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체호프의 동상이 높이 서 있다.
극장 뒤로 돌아가면 그가 의사로서 진료를 했던 작은 병원이 있다. 이 병원 안에는 체호프가 썼던 하얀색 마도로스 모자, 흰 가운, 몇몇 진료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체호프가 가족들과 살았던 아담한 집이 있으며, 그 가까이에 그가 『갈매기』 『바냐 아저씨』 등을 썼다는 조그만 별채가 있다. 별채 앞에는 ‘『갈매기』를 쓴 곳’이란 팻말이 붙어 있다. 병원과 집 사이에는 체호프의 흉상이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다. 필자가 갔던 때는 5월 초였는데 집 주변에서 몇 사람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의 차이콥스키 사진
집 안은 여느 집처럼 침실, 식당, 서재 등으로 칸칸이 나뉘어 있고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서재 안 책상 위에서는 다른 유품들과 함께 놓여 있는 작곡가 차이콥스키(1840~1893)의 사진이 유독 눈에 띈다. 체호프와 차이콥스키의 각별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나이로는 체호프보다 스무 살 위다.
체호프는 1888년 극작가였던 차이콥스키의 동생을 통해 당대 유명한 작곡가인 그를 알게 되었다. 그 후 체호프는 자신의 단편집 등을 차이콥스키에게 증정했고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사진을 체호프에게 선물했다. 체호프 책상 위의 사진이 원본인지 복사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선물로 받은 그 사진일 것이다. 체호프는 차이콥스키의 사진을 1892년부터 멜리호보 집에 걸어두었다.
1889년 10월 체호프가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집을 방문했을 때는 차이콥스키가 오페라로 구상 중인 레르몬토프의 소설 『벨라』에 대해 같이 논의한 일도 있다. 체호프는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좋아했다고 한다.
차이콥스키 사진 외에 벽면에는 톨스토이, 푸시킨, 투르게네프의 사진도 걸려 있다. 식당 한쪽에는 지금 서울에서도 커피숍 등에서 이따금 보는 조그만 수동 커피 분쇄기가 놓여 있다. 아마 체호프가 커피를 좋아했었나 보다. 모스크바에 있는 톨스토이의 하모브니키 저택에도 비슷한 커피 분쇄기가 있었다.
체호프 문학의 전환점이 된 모험적 여행
극작가 겸 단편 작가 안톤 체호프. 그는 44년의 짧은 생을 살았으나 그의 작품은 지금도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른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이야기할 때 30세에 감행한 시베리아 횡단과 사할린섬 방문을 빼놓을 수 없다.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고 문단의 주목을 받을 때였다. 위험하고 의미 없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말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 모험적 여행은 그의 문학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으며 그의 인생관을 크게 바꿔놓았다.
여행을 떠날 때 건강도 좋지 않았다. 폐결핵이 이미 그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여행의 동기는 체호프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심기일전’을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의 성공 뒤에 찾아온 불안과 초조감에서 새로운 도전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실제 당시 비평가 중에는 체호프의 작품에 주의나 주장, 주제 의식이 분명치 않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떠나 사할린에 석 달간 머문 후 12월에 돌아왔다. 오며 가며 길에서 보낸 다섯 달을 포함, 여덟 달이 걸린 여행이었다. 갈 때는 육로로 시베리아를 횡단했고, 올 때는 배로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빙 돌아 수에즈 운하, 흑해를 거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그는 사할린에서 유형수와 주민들을 만나 무려 8천 장에 이르는 조사 카드를 작성했다. 본업이 의사였던 그는 그곳 유형지의 환경은 물론 유형수와 주민들의 질병에 대해서도 조사했고 잠시 진료도 했다. 시베리아와 죄수의 섬 사할린 여행은 그에게 확실히 큰 영향을 주었다.
사할린에 가기 전까지 그는 톨스토이주의자였다. 악에 대한 무저항, 비폭력에 대해 공감했었다. 그런데 유형지에서 극한의 비참한 처지에 떨어져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본 후 악에 대한 무저항 철학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체호프는 마침내 “나는 두 번 다시 톨스토이주의자가 되지 않겠다”라고 자신의 시베리아행을 만류했던 <신시대>지 사장 수보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체호프는 여행기 『시베리아에서』(1890)와 사할린섬 탐방기, 즉 현장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사할린섬』(1893)을 내놓는다.
체호프의 『시베리아에서』는 길지 않은 여행기다. 시베리아의 추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베리아에서』
“도대체 자네들 시베리아는 왜 이렇게 추운 거요?”
“하느님 마음이죠!”
마부가 대답한다.
그렇다. 이미 5월이다. 러시아에서 숲이 녹색으로 변하고 꾀꼬리가 쉴 새 없이 지저귀고, 남쪽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아카시아와 라일락이 피어 있을 것이나 여기 튜멘에서 톰스크로 이르는 길의 땅은 갈색이고, 숲은 앙상하고, 호수마다 두툼한 얼음이 덮여 있고, 기슭과 풀밭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다.
대신에 나는 일생 보지 못했던 많은 야생 새들을 보았다. 야생 오리들은 들판을 거닐거나 물웅덩이와 길가 도랑에서 헤엄치고 있거나 바로 마차 옆에서 일제히 날아오르기도 하고 자작나무 숲에서 게으름 피우듯 난다. 고요 속에 갑자기 익숙하고 아름다운 곡조가 들려와 위를 쳐다보면 머리 위 높지 않은 곳에 학 한 쌍이 보이고 왜 그런지 처량해진다. 저쪽에서 야생 거위들이 날아가고 눈처럼 희고 아름다운 고니들의 무리가 횡하니 지나간다. 사방에서 도요새들이 끼륵거리고 갈매기들이 울고 있다.
(『안톤 체호프 사할린섬』, 51쪽, 배대화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12 / 주: 이 책에는 ‘시베리아에서’와 ‘사할린섬-여행기 중에서’가 1부와 2부로 나뉘어 실려 있다.)
체호프가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날은 1890년 4월 21일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야로슬라블까지는 기차로 갔고, 거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볼가강을 따라 페름까지 이동했다. 페름에서 다시 기차로 튜멘까지 간 후 비로소 마차 여행을 시작하였다.
길은 형편없었다. 낮에는 녹아 질퍽거리는 진흙탕이 되고 저녁이 되면 땅은 다시 얼어붙어 울퉁불퉁해졌다. 마차는 튀고 쿵쿵거리고 삐걱거렸다. 이르쿠츠크를 지나 바이칼 호수를 배로 건넜다. 다시 마차로 스레텐스크로 가서 배를 타고 아무르강을 따라 7월 5일 태평양 연안의 항구도시 니콜라옙스크에 도착했다.
이곳에 와보니 사람들은 종교와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푸시킨이나 고골은 알지도 못했다. 서쪽 러시아에서 온 그를 외국인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체호프는 니콜라옙스크에서 3일 만에 중급 규모의 상선 바이칼호(號)를 타고 사할린섬과 육지 사이의 타타르만을 따라 내려가다 데카스트리에서 1박 한 후 마침내 7월 11일, 사할린 중부에 있는 알렉산드롭스크에 도착했다. 모스크바를 떠난 지 두 달 20일 만이다.
여행에 대해 회의에 휩싸이기도
“이 지긋지긋한 권태! 심기일전을 위해 조국의 변방을 사모했고 (…) 불운하게도 앙상한 잿빛의 보잘 것 없는 삶만 추억하게 되었으니. (…) 되돌아가자니 그렇고.”(『안톤 체호프 사할린섬』, 82쪽)
시베리아 여행 중에도 문득 문득 이 고단한 여행을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목적지인 사할린으로 가는 배편을 기다리며 니콜라옙스크에 있을 때는 더 심각한 회의에 휩싸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난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스스로 물어본다. 내 여행이 극단적으로 경솔한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형지는 벌써 가깝고 추천장 한 장 없이 며칠 후면 사할린 땅에 내리겠지만 되돌아가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으로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불안하다.” (『안톤 체호프 사할린섬』, 118쪽)
남북으로 길쭉한 사할린은 북쪽이 육지에 가까워서 1849년까지 ‘반도’로 잘못 알려졌었다. 섬의 남북의 길이는 950km, 폭은 27~160km이다. 면적은 72,492km²로 남한 면적 99,720km²의 약 73%에 달한다. 쿠릴 열도를 포함한 사할린주(州) 전체 면적은 87,100km²이다. 체호프는 그의 책에서 어느 작가의 말을 빌려 사할린의 모양이 철갑상어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실제 남쪽 끝은 철갑상어의 꼬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체호프는 사할린 남부의 3분의 1은 과거 일본령이었으며 1875년부터 러시아에 귀속되었다고 했는데, ‘사할린은 원래 아이누족의 땅이며 사할린에 일본 땅은 없다’는 기록도 있다. 러시아와 일본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서 사할린 남쪽 바다와 쿠릴 열도(남부 4개 섬 이북) 사이를 양국의 국경으로 정했다. 그 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말기, 승리의 여세를 몰아 사할린 남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1945년 태평양 전쟁에 패전한 후 사할린 남부는 다시 러시아에 귀속되었으며 쿠릴 열도 4개 섬까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이 사할린 남부를 점령하고 있을 때 일제 식민지하의 수많은 조선인(한인)들이 이곳의 탄광으로 강제 징용되어 끌려갔다. 일본인들은 패전 후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조선인들은 무국적자가 되어 그대로 사할린에 방치되었다. 1945년 해방 당시 사할린의 조선인 강제 징용 피해자의 숫자는 4만3천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에는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게다가 동포들은 남북 분단으로 오도 가도 못 하고 이 섬에 갇힌 채 오랜 방황과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사할린 인구 50만 가운데 한인이 2만5천 명으로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은 인구 분포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사할린 실태 보고서 『사할린섬』
사할린에서 체호프는 유형수들과 주민들을 만나 8천 장에 이르는 조사 카드를 작성한다. 조사서는 그곳 경찰서 부속 인쇄소에서 만들었다. 카드 안에는 마을 이름, 피기록자의 신분 즉, 징역 유형수, 이주 유형수(농민), 자유민 등을 기록했고 연령과 종교, 출생지, 사할린에 온 연도, 중요한 직업과 기술, 읽고 쓰는 능력, 가족 관계 등을 12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했다. 당국은 정치범 접촉을 제외한 일반 유형수의 접촉은 허용했다.
그는 이 카드를 토대로 유형수들의 실태는 물론 형이 끝난 후 이곳에서 주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후일 『사할린섬』에 담았다. 의사로서 유형지의 각종 질병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했으며 진료를 하기도 했다. 사할린에 머무는 동안 체호프는 수용소에서 유형수에게 피가 터지도록 수십 대의 태형을 가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는 이 절망적인 유형지에서는 아기의 출생도 반가워하지 않는다고 썼다.
(사할린의) 가족은 새로운 인간의 출생을 반가워하지는 않는다. 아이의 요람 위에서 아무도 노래를 불러주지 않으며 들리는 것은 오로지 슬픈 푸념 소리뿐이다. 아이에게 먹일 것도 없고 사할린에서 아이들이 배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가장 좋은 일은, 자비로운 주님이 아이를 가능한 한 빨리 데리고 가버리는 일”이라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한다. 만약 아이가 울거나 보채기라도 하면 화가 나서 소리친다.“시끄러워. 그냥 뒈지든지!” 그러나 뭐라고 말하고 슬프게 푸념을 늘어놓든지 간에 사할린에서 가장 유익하고 가장 필요하며 가장 기분 좋은 인간이 바로 아이들이며 유형수들도 스스로 이것을 잘 알고 아이들을 소중히 여긴다. 거칠고 도덕적으로 너덜너덜해진 사할린의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은 부드러움, 깨끗함, 상냥함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순진무구한 그들은 결함 있는 어머니와 강도인 아버지를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한다.(『안톤 체호프 사할린섬』, 396~397쪽)
다시마 채취 작업장에서 일한 사할린 최초의 한국인들
당시 사할린 남부 서쪽의 마우카(현재 이름은 홀름스크) 지역에서는 다시마 채취 사업이 번성했다. 주로 중국에 팔기 위해서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이전에는 일본인들이 하다가 체호프가 갔을 때는 러시아 상인 세묘노프에게 넘어가 있었다. 체호프는 『사할린섬』에서 “세묘노프 아래에는 만자(우수리 지역과 연해주에 사는 중국인), 한국인과 러시아인이 일하고 있다. 우리 이주 유형수들이 여기에 각자 개인적인 이유로 돈 벌러 온 것은 1886년 무렵이다”라고 썼다. 이 대목을 근대 사할린 거주 한국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체호프는 그의 『사할린섬』 뒷부분에 ‘다시마 채취 사업’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또 <크론쉬타트통보> 1880년 제112호에서 ‘사할린섬, 마우카만에 관한 상당히 흥미 있는 몇 가지 정보’라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내용은 마우카가 10년간 해조류 채취권을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은 회사의 소재지였고 그 주민은 유대인이 3명, 러시아 군인이 7명, 그리고 한국인, 아이누인, 중국인으로 구성된 노동자가 700명이라는 것이다.”
체호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올 때는 선박을 이용했다. 10월 13일 사할린 남쪽 코르사코프항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를 거쳐 흑해로 들어와 12월 8일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56일 걸렸다. 육로로 갈 때(81일)보다 훨씬 빠르게 왔다.
체호프가 사할린에 다녀온 이듬해인 1891년,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니콜라이 황태자가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코스는 체호프와 정반대였다. 해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왔다.
배를 타고 인도양, 남중국해를 지나 일본을 경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할 때는 마차를 탔는데 석 달이 걸렸다. 체호프가 모스크바에서 사할린으로 육로로 갈 때 걸린 기간과 비슷하다.
조선 말인 1896년, 고종황제의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이 차르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배로 북미로 가서 기차로 대륙을 횡단, 뉴욕에서 다시 배를 타고 영국, 네덜란드 등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가는 데 48일이 걸렸다. 귀국할 때는 시베리아를 거쳐 왔는데, 1891년 착공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완공 구간이 공구별로 있었으므로 기차를 몇 차례 이용했다. 완공이 안 된 지역에서는 마차와 선박을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두 달가량 걸려서 갔다. 부분적으로 기차를 이용함으로써 여행 기간을 그 이전에 비해 많이 단축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처럼 마차로만 여행했다면 체호프나 니콜라이 황태자처럼 석 달가량 걸렸을 것이다.
현재 사할린에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체호프 사할린섬 박물관, 체호프 동상 등이 있으며 섬의 서편 타타르만에 면한 홀름스크시 북쪽에는 체호프 마을도 있다. 체호프가 돌아와서 쓴 『사할린섬』은 사할린 최고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계속)
▶ <우먼센스>에서는 바이칼BK투어(주)와 함께 오는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7박8일의 일정으로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등 러시아 문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러시아 문학 기행’을 실시한다.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관련 내용은 우먼센스 2017.09 106p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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