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 아누 파르타넨은 사랑에 빠진다. 아누는 핀란드에서 나고 자란 저널리스트다. 그런데 하필이면 뉴욕에 살고 있는 미국 남자를 만나버렸다. 사랑이 무르익을수록 둘 사이의 거리는 견딜 수 없이 멀게 느껴진다. 결국 결혼을 결심하고 어느 곳에서 살아야 하나 고민하다 둘은 새 삶을 펼칠 장소로 역동적인 도시 뉴욕을 선택한다. 이후의 끔찍한 생활은 예상하지 못하고.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는 왜 뉴욕에서의 삶이 불행할까, 어째서 북유럽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걸까 고민하며 쓴 책이다. 아누는 이전의 연구를 뒤지다 ‘사랑에 관한 스웨덴 이론’을 찾아낸다. 스웨덴 역사가가 세운 이론인데, 이름만 들으면 연애 상담을 할 때 필요한 이론 같지만 꽤 진지한 사회 분석 이론이다. 하지만 설명하기는 쉽다. 우리는 모두 ‘삐삐 롱스타킹’을 알고 있으니까!
양쪽으로 솟아오른 땋은 머리와 알록달록한 스타킹, 주근깨투성이 얼굴에 까랑까랑한 목소리의 삐삐 롱스타킹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힘세고 돈 많고 제멋대로 매력적인 이 소녀 이야기는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된 동화뿐 아니라, 온갖 영화와 TV 시리즈로 만들어져 어린 우리를 홀렸다. 말괄량이치고 “삐삐 같다”는 소리를 안 들어본 이 없을 것이다. 내 경우는 그 소리를 지금도 듣고 있다.
그런데 ‘사랑에 관한 스웨덴 이론’과 삐삐 롱스타킹이 어떤 관계에 있다는 것일까. 이들은 무척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삐삐를 보고 이 이론의 핵심 개념을 생각해낸다. “진정한 사랑과 우정은 독립적이고 동등한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의탁하고 있다고? 이웃이 없으면 생계가 불가능하다고? 부인이나 남편이 전적으로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 그렇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과 우정이 되기 힘들다. 삐삐를 보라!
사실 삐삐 롱스타킹은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꿈이었다. 1926년,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의 아스트리드는 기혼 남자와의 연애로 임신을 하게 된다. 보수적인 시골 동네에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오직 아이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아스트리드는 혼자 마을을 떠나 스톡홀름으로 간다. 어리고 돈도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아스트리드는 간신히 아버지 없이 아이를 낳는다. 다행히 아이를 잃지는 않았지만, 아이와 함께 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한 만큼 충분한 돈을 받을 수 있었다면, 사회보장제도가 잘되어 있어서 미혼모도 아이를 기르기 수월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초인적인 힘과 금화가 가득한 상자를 가지고 있는 삐삐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들어 옮기듯 아들 라르스를 아스트리드의 품으로 안아 옮겨주었을 텐데. 어려운 시절을 겪은 아스트리드는 모두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서로 사랑하는 사회를 꿈꾸었고, 이후 스웨덴은 확실한 복지로 그 꿈에 화답했다.
한때 나는 “내가 부양하고 싶은 남자가 나타났을 때만 결혼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남자의 경제력에 의지한다면 진심으로 사랑하기 어려울 것 같았고, 여자가 먹여 살리는 데 자격지심을 갖는 남자라면 내 기준에 안 맞을 것 같았다. 삐삐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이론’을 보면서 나는 그때의 내 불안한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다. 아스트리드는 상상의 힘으로 의심할 여지없이 진심인 사랑과 우정을 보여주었다. 그것이야말로 삶을 채우는 가장 큰 힘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상상력이란 얼마나 힘이 센가. 거창한 이론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삐삐에게서 관계의 비밀을 배운다.
글쓴이 박사
문화 칼럼니스트. 현재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 경북교통방송의 <스튜디오1035>에서 책을 소개하는 중이며, 매달 북 낭독회 ‘책 듣는 밤’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도시수집가> <나에게 여행을> <여행자의 로망 백서> <나의 빈칸 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