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의사의 둘째 아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모스크바에서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자란 집은 의사들의 숙소였던 병원 옆 3층짜리 건물의 1층 일부였다. 이 건물 1층 가족이 살던 곳은 현재 도스토옙스키 생가 박물관이 되어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도로 쪽 건물 벽면에는 ‘1821년 11월 11일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난 집’이란 조그만 표지판이 붙어 있다. 도로의 이름도 도스토옙스키 거리다.
이곳에 들어서면 도스토옙스키가 형 미하일과 함께 지냈다는 형제의 방이 처음 눈에 띈다. 방이라곤 해도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복도의 일부를 가림막으로 막아놓은 형태다. 실내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진과 펼쳐진 성경, 몇 권의 오래된 책들, 응접세트, 스탠딩 피아노 등이 놓여 있는데, 모두 이곳을 박물관으로 만들면서 전시를 위해 마련해놓은 것 같았다. 가족이 살았던 곳은 오래 둘러볼 만큼 크지 않았다. 당시 가난한 의사 가족이 살던 집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만한 규모다. 가족들이 실제 사용했던 공간은 지금의 박물관 크기보다 작았을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레닌 도서관) 앞에 동상을 세워놓을 정도인 인물의 생가 박물관치고는 작고 단순하다는 느낌이었다. 들어갈 때 입장료는 실내에서 받았는데, 입장료를 받는 창구 맞은편 창 쪽에는 통나무를 조각해 만든 도스토옙스키의 상반신상이 놓여 있다. 필자가 방문한 날은 지난(2017년) 5월 6일 토요일이었다. 주말이어서인지 다른 방문객은 눈에 띄지 않았다.
10대 후반에 양친을 모두 잃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리투아니아 성직자의 아들로 성직자가 되려고 신학교에 갔다가 진로를 바꿔 의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모스크바의 황실 의학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때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구제병원에서 일했다. 이 병원에 딸린 의사 숙소 건물이 표도르가 태어난 곳이다.
도스토옙스키 아버지는 열심히 일한 덕에 둘째 아들 표도르가 9세 되던 해에 훈장을 받고 8등 문관으로 승진하는데, 당시에는 8등 문관부터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낮은 계급의 귀족은 실상 전통 있는 귀족과 평민의 중간쯤 되는 잡계급으로 간주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귀족이 된 후 그간 근검절약해 모은 돈으로 모스크바 남쪽 툴라 지방에 땅을 구입해 귀족으로서의 면모를 다소나마 갖추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땅이 화근이 되어 도스토옙스키 아버지는 둘째 아들 표도르를 공병학교에 입학시킨 이듬해인 1839년 영지에서 죽는다. 사인은 분명치 않은데, 농노들을 지나치게 엄하게 대하다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는 토지와 그 토지에 딸린 농노들을 함께 사고팔던 시대였다. 그보다 2년 전인 16세 때 어머니를 여읜 데 이어 아버지까지 잃은 것이다.
생가 박물관 옆 고전 건축 양식의 마린스키 빈민구제병원은 그 규모가 제법 커 보였다. 이 병원 정원 한가운데에는 도스토옙스키 동상이 서 있다. 머리를 조금 숙인 채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이다. 레닌 박물관 앞의 앉아 있는 동상도 턱만 괴지 않았을 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많이 닮았는데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은 어디서나 심각한 모습이다. 생가 박물관 안의 나무 조각상도 마찬가지다.
토목 기술자의 길 대신 문학의 길로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 수학 중 하사관으로 임명되어 소위까지 군 복무를 하고 22세 때인 1843년 공병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공병국 제도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토목 기술자의 길을 포기하고 문학의 길로 나섰다. 그러고는 24세 때인 1845년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고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시인 네크라소프가 이 소설의 원고를 처음 본 후 “새로운 고골이 출현했다”며 벨린스키에게 원고를 보여줬다.
“3일 후 도스토옙스키는 벨린스키에게 안내되었다. 벨린스키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자네가 쓴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있는가? 스무 살의 자네 나이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을 텐데.’ 그리고 그는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젊은 작가를 향해 작품의 의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말 나는 그렇게 위대한 작가인가?’라고 도스토옙스키는 자문했다. 30년 후 이때의 장면을 ‘내 생애에 있어 가장 황홀했던 순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평전』, 34쪽)
도스토옙스키는 이같이 당대의 유명 비평가 벨린스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고 우쭐대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쓴 소설 『분신』은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페트라 스키 독서 클럽에 들어갔다가 1849년 4월부터 꼬박 10년의 세월을 감옥과 시베리아 수용소, 군 복무로 보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의 8개월간의 감옥 생활, 시베리아 옴스크 수용소에서의 4년간의 강제 노동, 세미팔라틴스크에서의 5년 3개월간의 군 복무가 그것이다.
여인들, 능수능란한 말괄량이 수슬로바
도스토옙스키의 일생에는 몇 명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사별한 첫 부인 마리야 이사예바와 두 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그 둘 사이의 폴리나 수슬로바와 안나 고르빈크루콥스카야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도스토옙스키가 한때 깊이 빠져들었고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수슬로바라고 할 수 있다.
아폴리나리아(폴리나) 수슬로바는 작가를 지망하는 대학생이었다. 미모에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도스토옙스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다음 해인 1860년 9월, 형 미하일과 함께 출범시킨 문학잡지 <시대>에 단편을 보내면서 그와 사귀게 되었다. 수슬로바와 도스토옙스키는 나이 차이가 스무 살도 더 났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1863년 여름에 함께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기로 할 정도로 깊어졌다. 시베리아에서 결혼한 첫 아내가 폐결핵으로 상태가 좋지 않을 때다. 수슬로바가 파리로 먼저 떠났고 도스토옙스키가 뒤따라갔다. 도스토옙스키는 파리로 가는 도중 독일 비스바덴의 도박장에 들렀다가 운 좋게도 5천 프랑을 따는 행운을 만나기도 했는데 이게 그가 도박에 빠지는 화근이 된다.
그는 거액을 손에 넣자 득의만만해져 돈의 일부를 처제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수슬로바를 만났을 때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비스바덴의 도박장에서 너무 긴 시간을 보낸 것도 이유였지만, 그를 기다리는 사이에 수슬로바가 한 스페인 남자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스페인 남자와의 관계는 남자 쪽의 거부로 오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두 사람은 당초 약속대로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했다. 도박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도스토옙스키는 가는 길에 비스바덴을 경유해 다시 도박장에 들렀으나, 이번에는 그만 갖고 있던 현금의 전부인 3천 프랑을 몽땅 잃고 말았다.
다급해진 그는 처음에 딴 돈의 일부를 보내주었던 처제에게 송금을 부탁해 제네바까지 갔다. 또다시 돈이 떨어지자 자신의 시계는 물론 수슬로바의 반지까지 저당 잡히며 궁색한 여행을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이탈리아의 로마와 나폴리까지는 구경했다. 그는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잡지 편집장 보보리킨에게 잡지에 실을 소설을 쓸 테니 원고료를 선금으로 300루블만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 돈을 받아 겨우 여행을 마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수슬로바는 도중에 그와 헤어져 파리로 갔다. 두 사람은 그 후 첫 부인이 사망한 이듬해인 1865년 비스바덴에서 다시 만난 일이 있으나 감정이 회복되지는 않았다. 보보리킨에게는 결국 소설을 보내지 못해 형 미하일이 동생이 빌린 돈을 갚아주었다.
도스토옙스키 평전의 저자 E. H. 카는 도스토옙스키는 충동성이 강하고 어린아이 같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수슬로바는 능수능란한 말괄량이로 표현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백치』의 나스타샤 필리포브나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그루센카 같은, 그의 소설 속의 강한 여자의 원형을 수슬로바에게서 찾는다.
그는 첫 아내가 죽은 후 그의 문학잡지 <세기>(형 미하일과 만든 <시대>를 폐간한 후 복간하면서 바꾼 제호)에 원고를 보내던 안나 고르빈크루콥스카야와 마르타 브라운이라는 여성과도 교제한 일이 있고 청혼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수슬로바에게도 몇 번 구혼했으나 퇴짜를 맞았을 뿐이다. 두 번째 아내가 되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의 만남은 그가 매우 절박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작가와 속기사의 만남 - 생애의 전환점이 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865년 여름, 스첼롭스키라는 출판업자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이듬해인 1866년 11월 1일까지 일정 분량의 새 소설과 도스토옙스키 전집 출판을 조건으로 3천 루블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러면서 도스토옙스키가 기한 내에 소설을 쓰지 못할 경우, 도스토옙스키의 지난 작품과 앞으로의 모든 작품을 자신이 무료로 출판할 권리를 갖는다는 단서를 붙였다. 다시 말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모든 작품의 출판권을 업자가 갖는다는 무서운 단서 조항이었다.
돈이 궁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이런저런 생각 없이 흔쾌히 이에 응했고, 1865년 7월 2일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돈을 받아 급한 빚을 갚은 후 그리워하던 수슬로바를 만나기 위해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8월 10일 비스바덴에서 수슬로바를 만나 며칠간 같이 있었다. 그렇다고 연인 관계가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8월 15일, 갖고 있던 돈을 도박장에서 몽땅 잃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부유한 귀족 작가 투르게네프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간절한 편지를 보내 50탈러를 송금 받았다. 그 돈으로 수슬로바를 파리로 돌려보냈고 자신은 시베리아 군 복무 시절부터 늘 그를 도와주던 브란겔 남작에게서 100탈러를 빌리는 등 한두 군데에서 더 돈을 변통해 가까스로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폴리나 수슬로바는 1880년 로자노프라는 연하의 남성과 결혼하며 로자노프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비평하는 유명한 비평가가 된다.
도박장에서 떠오른 『죄와 벌』 스토리
도스토옙스키는 비스바덴의 도박장에서 룰렛으로 모든 돈을 잃은 후 『죄와 벌』의 줄거리를 떠올렸다고 후일 어느 편지에서 말했다. 당장 굶을 처지가 되어 옷가지 등을 비스바덴의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리면서 전당포 주인에게서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주인 자매를 살해하는 스토리인 『죄와 벌』은 도스토옙스키가 매우 곤궁한 상황에 처해 있던 비스바덴에서 쓰여지기 시작했다. 『죄와 벌』은 1866년 1월 <러시아 통보>에 제1회분이 실린 이후 2월호, 4월호 등에 계속해 실렸다.
이 무렵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제1부와 제2부도 <러시아 통보>에 실리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는 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처음의 제목은 ‘1805년’이었다. 두 작가는 이렇게 출판물에서 처음 만나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으나 생전에 직접 대면할 기회는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을 쓰는 동안 스첼롭스키와 이해 11월 1일까지 약속했던 새 소설에 대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스첼롭스키에게 보낼 소설로 3년 전 수슬로바와 유럽 여행 중 착상했던 『도박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럭저럭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 약속한 시간을 한 달 정도 남겨두게 되었으나 그때까지도 도스토옙스키는 『도박꾼』을 한 줄도 쓰지 않고 있었다. 이때 사정을 알게 된 밀류코프 등 세 친구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자신들이 도스토옙스키의 구상에 따라 한 부분씩 쓰고 이것을 도스토옙스키가 정리해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제안을 실현 불가능하며 불명예스러운 것이라며 거부했다.
밀류코프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속기사를 보내줄 테니 구술을 해서라도 소설을 기한 내에 완성하라고 설득했고 도스토옙스키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1866년 10월 4일 속기를 배우던 20세의 여학생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가 도스토옙스키의 아파트를 찾아가게 된다. 이때 도스토옙스키는 45세였다.
구술은 스피드 있게 진행되었다. 안나는 속기한 것을 집으로 가져가 글로 정리해 이튿날 가져왔다. 구술이 끝난 것은 29일, 25일 만에 약 4만 단어의 소설이 쓰인 것이다. 소설의 원고는 30일과 31일에 정서된 후, 11월 1일 출판업자에게 넘겨졌다. 사실 11월 1일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가져갔는데 그가 자리에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만약의 경우 기일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원고를 근처 경찰서에 맡겼다. 그해 11월과 12월에는 『죄와 벌』의 마지막 부분을 안나에게 구술해 마쳤다. 『도박꾼』의 원고를 마친 후 도스토옙스키는 마음을 졸이며 안나의 어머니를 방문해 결혼 승낙을 받았다. 두 사람은 1867년 2월 15일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의 집 내부.
위기에서 벗어나고 젊은 새 부인도 얻고
도스토옙스키는 변덕스러운 애인 수슬로바를 만나기 위해 비스바덴까지 갔다가 수슬로바와의 관계 회복도 잘 안 되고 설상가상으로 도박판에서 가지고 있던 돈마저 몽땅 잃어 빚까지 더 진 상태였다. 그런 데다 출판업자에게 저술의 소유권까지 몽땅 뺏길 뻔한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신속히 소설을 완성해 위기에서 벗어나고 젊은 새 부인까지 얻는 극적인 반전을 이룬 것이다.
안나는 결혼 이후 도스토옙스키의 한심한 재정 상태를 알게 된다. 그녀는 빚쟁이들의 독촉과 친척들의 집요한 지원 요구에서 벗어나려고 도스토옙스키를 설득해 신혼여행을 핑계 삼아 유럽으로 장기간 도피했다가 4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결혼 이후 도스토옙스키는 비로소 안정을 찾은 가운데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 대작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러시아 최고의 소설가로서 명성을 쌓아간다. 가정적으로도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으나 이 중 1남 1녀를 잃는 슬픈 일도 겪는다.
56세 때인 1877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스타라야 루사에 별장도 마련했다. 죽기 1년 전인 1880년쯤엔 빚도 거의 정리했다. 선금을 받는 습관은 여전해 죽기 3일 전에도 출판사 편집자에게 선불로 4천 루블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돈은 주조된 자유다
1881년 1월 26일, 여동생 베라가 여동생들의 대표로 찾아왔다. 오빠에게 돈 많은 쿠마니나 이모가 어딘가에 남긴 재산(땅)의 상속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러 왔던 것이다. 그녀의 주장은 오빠가 과거에 아버지의 유산을 돈으로 다 받고 피상속자 명단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는데 다시 쿠마니나 이모의 피상속자 대열에 끼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화가 잔뜩 난 상태에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혈을 시작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결국 이틀 만에 폐출혈로 죽었다. 그는 전부터 폐가 나빠서 해외에 치료하러 갔던 적도 있었다. 평생 돈 걱정을 했고 돈 문제로 여동생과 다투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돈에 대해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낭비가형이었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돈 걱정을 안 하고 산 때가 없었다.
유형 생활 중에 그는 돈에 대해 매우 중요한 발견을 했다(이런 것도 발견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돈은 주조된 자유’라는 것이다. 유형수들은 그 억압된 공간 속에서도 이런저런 잔일들을 해서 동전 하나라도 더 벌려고 애썼다며 그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엔 장화공도 단화공도, 재봉사도, 목수도, 열쇠공도, 재단공도 도금사도 있었다. (…) 그들은 모두 열심히 일을 해서, 꼬뻬이까 동전 하나라도 더 벌려고 했다. 작업의 주문은 도시에서 얻어왔다. 돈은 주조된 자유였다. 그래서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돈은 열 배나 더 귀중한 것이었다. 만일 돈이 주머니 속에서 짤랑짤랑 소리를 내기만 해도, 비록 그것을 쓸 수는 없지만, 벌써 반 이상이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었으며, 더욱이 금단의 열매는 두 배나 달콤한 법이었다. 감옥에서도 술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파이프 담배도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모두들 그것을 피우고 있었다. 돈과 담배는 괴혈병과 그 밖의 다른 질병으로부터 죄수들을 구해주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 35~36쪽)
살 만할 때 세상 떠나
평생 빚에 쪼들렸던 그는 언제나 돈의 자유를 갈망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어디에도 돈 이야기가 안 나오는 데가 없다. 그만큼 돈은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화두였다. 누구라도 돈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는 말을 그는 여러 가지 형태로 그의 작품 이곳저곳에서 한다.
예순이 다 되어 겨우 돈의 자유를 조금 얻은 듯했는데 죽음의 그림자가 갑자기 그를 덮쳤다. 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1월 28일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1월 31일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묻혔다.
그가 선금을 받은 원고를 기한 내에 쓰느라 쫓기지 않고 톨스토이처럼 돈 걱정 없이 살면서 느긋하게 글을 썼더라면 더 훌륭한 저작들을 남겼을까? 그건 알 수 없다. 그의 천재성은 쫓기며 글을 썼기 때문에 발휘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억울하게 산 시베리아 유형과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돈 문제, 그의 명작은 그의 인생에 가해진 온갖 압박에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며 싸운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위대한 대하소설이었다.
▶ <우먼센스>에서는 바이칼BK투어(주)와 함께 오는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러시아 문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러시아 문학 기행’을 실시한다.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관련 내용은 우먼센스 2018.07 p.104 참조.
▶ [투어] 러시아 문학 기행 7박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