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오전 11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차분한 목소리로 선고 요지를 읽어 내려갔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정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인용되는 순간이었다. 헌법재판소는 “법 위배 행위가 헌법 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 효과가 중대하므로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판시했다. 굳은 표정으로 재판을 지켜보던 박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법정을 떠났다. 민주주의의 새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국가 최고 권력자에 대한 파면 선고는 촛불 시민 한 명 한 명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진 지난해 10월, 시민은 광화문에 모여 ‘민주주의’를 외쳤다. 박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성난 시민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1월 검찰은 최순실 사건의 의혹 규명을 위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국정농단에 연루된 ‘부역자’를 연이어 구속했다. 12월 들어선 정치권이 합의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사이 촛불 집회의 규모는 점차 커져 11월 12일 100만 명, 11월 26일 190만 명을 기록했다. 김진태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의원은 “촛불은 바람만 불면 꺼진다”고 했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촛불의 기세는 무섭게 타올랐다. 촛불의 요구는 분명했다. 하야 또는 헌법에 명시된 탄핵 절차를 통한 박 전 대통령의 퇴진이었다.
여론의 압박에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거취 문제를 국회에 맡기겠다며 국면 전환을 꾀했다.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탄핵 청구를 머뭇거렸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모두 탄핵 청구에 따른 이해득실을 따지기에 바빴다. 12월 2일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은 무산됐다. 주권자인 국민은 민의를 받들지 못한 정치권을 향해 준엄한 경고를 보냈다. 12월 3일 사상 최대 인원인 232만 명이 전국 곳곳에서 촛불을 들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야당 주도로 발의됐고, 비박계는 물론 기존 친박계 의원까지 탄핵 표결에 가세했다. 12월 9일 국회는 234명이란 압도적인 찬성으로 탄핵안을 가결했다.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같은 날 헌법재판소는 국회에서 넘어온 탄핵 심판 소추의결서를 접수하고, 강일원 재판관을 사건 주심에 배당했다. 해외에서 급히 귀국한 강 재판관은 “옳은 결론을 내리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 기록 등 사건 자료에 대한 재판관 전원의 검토를 거쳐 2017년 1월부터 본격적인 증인 신문이 열렸다.
박 전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심리 중인 탄핵소추 사유를 전면 부인했다. 같은 달 사건 증인으로 법정에 선 최순실은 “기억이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탄핵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증인 39명을 무더기 신청하며 지연 작전을 폈다. 사건을 심리한 박한철 당시 헌법재판소장은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 전인 3월 13일까지는 “탄핵 심판을 매듭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1월 31일 퇴임하면서도 박 소장은 대통령 권한 정지로 인한 국정 공백을 우려했다.
반면 박 전 대통령 측의 재판 방해는 강도를 더해갔다. 박 전 대통령은 인터넷 팟캐스트 ‘정규재 TV’ 인터뷰에서 “엮어도 너무 엮은 것”이라며 의혹을 부인했고, 변호인단은 이른바 ‘고영태 녹취 파일’을 증거로 채택해야 한다며 재판부를 압박했다. 고영태 녹취 파일은 고영태 씨가 자신의 지인과 사적 대화를 주고받은 것으로 앞선 검찰 수사에서 최순실 국정농단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음이 드러난 바 있다. 재판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 대리인단인 서석구 변호사는 태극기를 꺼내 흔드는 돌출 행동을 했고, 김평우 변호사는 재판관을 향해 고함과 막말을 쏟아냈다. ‘섞어찌개’ ‘국회 대리인’ 등 재판부를 폄훼하는 언사가 ‘박근혜 지지자’들을 자극했다.
주말이면 촛불 시민과 대립한 태극기 부대가 “탄핵 기각!”을 외쳤고, 박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과 미국 성조기가 거리에 나부꼈다. 이들은 촛불 시민을 “빨갱이”라고 불렀다. 선고 전 마지막 공판까지 박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특검의 청와대 압수 수색과 대면 조사를 거부한 박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서의 최후 진술마저 회피했다. 헌법과 국민을 저버린 권력자의 말로는 파면이었다.
지난 3월 12일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자택으로 복귀한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을 기다리던 지지자들에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앞두고 일부 친박계 의원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정치적인 재기를 노리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오는 5월 대선 전까지 극우 세력이 재결집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 내부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버릴 수 없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어느 대선 후보가 정권을 잡든 지난 과오에 대한 반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다면 ‘제2의 국정농단’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당장 분열된 국론 통합이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국민이 주인 된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그것이 바로 촛불의 명령이다.
탄핵의 결정적 사유
헌재가 박 전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한 결정적 사유는 결국 비선 최순실을 앞세운 국정농단이다.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 씨의 사익 추구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고, 이를 위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고 최종 판단한 것. 구체적으로 박 전 대통령이 최 씨에게로 국가 정책 문건 유출을 지시·방치했고, 최 씨의 사익을 위해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 및 대기업 출연에 관여했다고 못 박았다. 게다가 최순실의 국정 개입 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부인하며 오히려 의혹 제기를 비난했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을 둘러싼 ‘세월호 7시간의 의혹’ ‘언론의 자유 침해에 대한 의혹’은 탄핵 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난 상황이 발생했다고 해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바로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설명. 대통령 직책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대통령 권한을 남용해 공무원 인사에 개입했는지에 대한 여부도 같은 이유로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헌법 재판관 8인의 92일
지난해 12월 9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 92일 동안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탄핵 심판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헌재 관계자들 사이에선 영화 <로마의 휴일>이 가끔 대화에 올랐다고 한다. 왕실 생활의 제약과 정해진 스케줄 등에 피곤해지고 싫증난 공주가 몰래 거리로 나와 만난 신문 기자와 자유를 만끽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가 요즘 재판관들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재판관들은 외부와 접촉을 끊고 재판 진행과 기록 검토를 했다. 최종 변론이 끝난 이후에도 주말을 반납하고 평의를 이어갔다. 이 기간 중 재판관들은 외부 전화도 받지 않고 동창 모임은 물론, 가족 모임까지 취소했다. 지난 1월 31일 퇴임한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마저도 한 사찰에 머물며 외부와 접촉을 끊었다.
기록 검토를 위해 이른 오전 출근한 재판관들은 점심과 저녁은 구내식당이나 배달된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변론이 열리는 날엔 식사 시간도 아껴가며 재판에 몰두했다. 헌재 구내식당 관계자는 “한창 재판이 진행 중일 땐 많이 바쁘신 것 같았다. 입맛도 돌지 않으시는지 예전보다 많이 잡수시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심리 초반엔 일부 재판관이 주변 눈을 피해 혼자 인근의 단골 식당에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재판이 진행될수록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고 한다.
헌재 안팎에선 재판관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말들도 나왔다. 정해진 퇴근 시간도 없었고,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기록을 보다가 보따리나 쇼핑백에 서류를 넣어 귀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판관들의 표정도 탄핵 심판 초기와 비교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몸무게가 줄거나, 불면이나 두통에 시달리는 재판관도 있었다고 한다. 탄핵 선고일이 다가오면서 재판관의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재판관에 따라 많게는 다섯 명, 적게는 두 명의 사복 경호원이 배치됐다.
재판관들이 지쳐갈수록,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변론 과정에선 날카로운 설전은 물론이고 고성도 오갔다. 인상적인 건 심리가 시작되기 전엔 양측 대리인단은 서로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는다는 것. ‘전투’를 앞두고 적의를 숨긴 탐색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양측 대리인단은 사법연수원 동기, 학교 선후배, 판검사 동료 등 법조계 인맥으로 얽혀 있다. 특히 권성동 의원과 서성건 변호사는 1960년생 동갑내기에 사법연수원 동기(17기)다. 이들은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을 정치 기반으로 함께 18대 총선(2008년)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명웅 변호사(국회 측)와 이중환 변호사(대통령 대리인단 측), 전종민 변호사(국회 측)와 유영하 변호사(대통령 대리인단 측)도 근무지가 같았거나 사법연수원 동기다.
방청석도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탄핵 심판 초반 비교적 성숙한 자세를 유지했던 방청석의 분위기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크게 달라졌다. 증언 중인 증인을 향한 욕설이 나오는가 하면, 심판정에서 태극기를 흔들어 제지당하는 방청객의 모습도 보였다. 재판에 개입하는 방청객이 늘면서 심판정을 지키는 헌재 직원들도 바빠졌다. 초반엔 휴대폰 사용을 제한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당부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젠 돌발 행동도 서슴지 않는 방청객들을 제지해야만 했다.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지난 2월 19일 열린 14차 변론에서 박수를 치며 재판을 방해한 남성에게 퇴장을 명령했다. 탄핵 심판이 시작된 후 첫 퇴장 조치였다. 명령에 불응한 이 남성은 결국 직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갔다.
재판관 이모저모
헌재 재판관은 9명으로 구성된다.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헌재 재판관 전체 9명 중 각각 3명씩을 인선한다.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9명 중 1명을 헌재소장으로 임명한다. 당초 법조계 일각에선 “헌재 재판관들의 지역이 편중됐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9명의 재판관 중 영남 출신은 박한철 전 헌재소장과 서기석·이정미·이진성 재판관이다. 호남 출신은 김이수 재판관이 유일하다. 조용호·안창호 재판관의 출신 지역은 충청, 강일원 재판관은 서울 출신이다.
재판관들의 정치적 성향도 관심사였다. 박 전 소장을 포함한 7명이 이명박 정부 때 임명됐고 박 전 대통령이 나머지 2명을 임명했다. 정치권 일각에서 “보수 재판관들이 촛불 민심을 거스르고 탄핵을 기각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도는 까닭이었다. ‘헤어롤 에피소드’를 남긴 이정미 전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추천으로 2011년 3월 최연소 헌재 재판관으로 임명됐다. 이 재판관은 진보 성향으로 분류됐지만 2013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 당시 주심을 맡아 통진당 해산에 손을 들었다. 헌재는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교육감직을 잃게 된 사후매수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이 재판관은 위헌 의견을 밝혔었다.
이삿짐 싼 박근혜 삼성동에서 진지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 이틀 뒤인 3월 12일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자택에 짐을 풀었다. 삼성동 자택은 박 전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기 전인 1990년부터 살았던 곳이다. 정계에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온 박 전 대통령의 향후 행보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퇴임 직후 별다른 메시지를 내지 않았던 박 전 대통령은 자택으로 복귀한 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사실상 불복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박 전 대통령은 재직 중 탄핵으로 파면됐기 때문에 경호 및 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이 누릴 수 있는 혜택 대부분을 박탈당했다.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은 재직 당시 연봉의 95%에 달하는 연금이 매달 지급된다. 비서관 3명과 운전기사 1명을 둘 수 있고 사무실 유지비, 기념 사업비, 국공립 병원의 무료 의료 혜택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정치권에선 박 전 대통령의 향후 거취 또한 뜨거운 관심사다. 국론 분열을 수습하는 데에도 박 전 대통령의 스탠스(Stance, 공개적인 입장)는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박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키는 건 소위 ‘골박(골수 친박계)’이라고 불리는 서청원·최경환·윤상현·조원진·이우현·김진태·박대출·민경욱 등 현직 국회의원 8명이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이 사저로 돌아가던 날 자택 앞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맞이했고 다음 날에도 박 전 대통령과 회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정치권 안팎에선 이들을 ‘삼성동계’로 칭하고 있다. 총괄은 친박계 맏형 격인 서청원·최경환 의원이, 정무는 윤상현·조원진·이우현 의원이, 법률은 김진태 의원이, 수행은 박대출 의원이 담당하게 됐다.
KBS 앵커 출신인 민경욱 의원은 대변인 격을 맡았다. 삼성동계라는 새로운 계파 출현에 야권에선 비난이 들끓었다. 박 전 대통령이 몸담고 있는 자유한국당 내부에서마저 힐난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인명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3월 15일 삼성동계를 향해 “당은 필요하다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징계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며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다. 논란이 계속되자 최경환 의원은 3월 14일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서 자원봉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그런 순수한 마음들이었다”며 “대통령이 탄핵됐다고 해서 인간적인 의리를 끊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오히려 정치권에선 사실상 삼성동계를 공식 인정했다는 풀이가 나온다.
박 전 대통령에겐 당장 넘어야 할 큰 산이 남았다. 3월 21일의 검찰 수사다. 검찰은 박영수 특검팀으로부터 대부분의 자료를 이첩 받아 수사를 준비하고 있다. 검찰은 그동안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진술과 증거를 사안별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 측 또한 막바지 대응 전략 마련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전직 국가원수로선 네 번째로 검찰 조사를 받는다.
검찰은 경호나 신변 안전 때문에 조사실 등 여러 요소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의 혐의는 뇌물죄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13가지다. 우선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을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 강요 등을 공모한 피의자로 보고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강요 등 8가지 혐의 사실을 공소장에 적시했다. 수사를 이어받은 박영수 특검팀은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수수, 직권남용 등 5개 혐의를 추가했다. 특히 박 전 대통령 측은 뇌물죄 성립 여부가 재판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고 검찰 수사에 대비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불발됐던 청와대 압수 수색 가능성도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현재는 일단 박 전 대통령 조사에 주력할 것”이라면서도 “나중에 필요하면 하겠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 측이 단순하게 재판에서 유·무죄를 다투고 형량을 낮추는 데에 초점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더라도 “국민 화합 차원에서 차기 대통령 임기 중반엔 사면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박근혜, 지방 거처 물색 속사정
박 전 대통령이 탄핵 심판 기간에 서울이 아닌 지방에 거처를 물색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두고 미묘한 정치적 해석이 오간다. 당시 정치권에선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구미와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고향인 충북 옥천 등이 후보지로 거론됐다. 이런 가운데 탄핵 심판 기간에 박 전 대통령 측이 대구 인근 부동산을 수소문했던 정황이 포착됐다. 한 친박 핵심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 측이 대구 일대에 부동산을 알아보고 다녔는데, 그게 박 전 대통령이 머물 곳이란 얘기를 들었다. 확인해보니 대구뿐 아니라 여러 곳을 후보지로 검토 중이더라”고 말했다.
대구는 박 전 대통령의 입지가 남다른 곳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 지역에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 여론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에겐 재기를 위한 기회의 땅인 셈이다.
탄핵 Q&A
Q 탄핵 선고 전날 가장 늦게 퇴근한 재판관은 이정미 전 재판관이다?
A 아니다. 선고 전날 가장 마지막으로 퇴근한 재판관은 안창호 재판관이다. 7명의 재판관이 오후 8시 50분 넘어 퇴근했는데 그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헌재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안 재판관은 “탄핵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 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라는 보충 의견을 냈는데, 헌법 연구관의 도움 없이 보충 의견을 스스로 집필했다고 한다. 선고 당일 가장 먼저 출근한 재판관은 강일원 재판관이다. 그는 오전 7시 33분경 차에서 내려 기자들을 향해 간단하게 목례한 뒤 사무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Q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의 출근길 헤어롤은 의도된 것이다?
A 탄핵 선고 당일 아침 현장에 모여 있던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빗발쳤다. 이정미 전 재판관이 분홍색 헤어롤 2개를 머리에 감은 채 출근길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전 재판관의 사진은 즉각 언론에 보도됐고 역사적인 순간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됐다. 이 전 재판관의 헤어롤은 세월호 참사 당일은 물론, 탄핵 이후에도 사저로 전담 미용사를 부른 박 전 대통령의 머리와는 대비되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각에선 ‘탄핵 인용’을 암시하는 퍼포먼스, 혹은 ‘8’명 헌법재판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전반적으로는 일하는 직장 여성의 분주한 모습과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Q 선고 시간은 21분으로 정해져 있다?
A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 주문은 당초 한시간가량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선고가 시작된 지 21분 만에 낭독됐다. 25분이 걸린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심판보다 4분가량 짧았다. 갈라진 민심을 의식해 최대한 간략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헌법 연구관들은 재판관들이 퇴근한 이후에도 새벽 3시까지 남아 선고 요지를 다듬고, 선고문 낭독 시간을 점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21분의 시간은 결정문 첫 장에도 기재됐다. 대통령의 파면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정미 전 재판관은 시계를 세 차례나 확인했다.
Q 박 전 대통령이 파면 후 바로 퇴거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A 박 전 대통령은 파면 선고를 받은 이후 3일째 되는 날인 12일 오후 7시가 지나서야 청와대에서 나와 삼성동 자택으로 이동했다. 박 전 대통령 측은 삼성동 자택을 수리하느라 퇴거가 늦어졌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일각에선 증거 인멸을 우려했다. 방송인 김어준은 “박 전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할 때까지 청와대에 계속 있겠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본인이 탄핵됐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Q 박 전 대통령은 사저로 들어간 후 눈물을 흘렸다?
A 맞다. 박 전 대통령은 사저로 퇴거하는 길에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 반면 집 안에서는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현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눈물을 보였다는 후문. 지지자들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들고 사저 앞에 집결한 친박 의원들과도 웃으며 대화하는가 하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는 등 밝은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대비된다. 이병기 전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눈물을 글썽였다”고 말했고,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도 “사저로 들어가시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증언했다.
Q 파면 대통령은 모든 예우를 받을 수 없다?
A 상황에 따라 다르다. 박 전 대통령이 자진 사퇴했거나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쳤다면 연간 약 1억원에 달하는 연금, 경호, 병원 치료, 비서관 3명과 운전기사 1명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재직 중 탄핵되면서 이 같은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됐다. 몇몇 예우는 그대로 지켜진다. 공항에서 VIP 의전은 여전히 받을 수 있고 사망 시 국가장이 치러질 수도 있다. 박 전 대통령은 3월 21일 검찰 소환조사를 앞두고 있다. 검찰도 가장 최근 전직 대통령 소환조사 사례인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때를 참고해 예우 수준을 검토 중이다. 대통령에서는 파면됐지만 검찰 조사에서도 일정 부분 예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Q 대선은 파면 후 언제라도 치를 수 있다?
A 아니다. 헌법과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헌재가 대통령 탄핵을 확정한 다음 날부터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고, 선거일은 50일 전까지 공고해야 한다. 이에 따라 선거일은 오는 4월 29일부터 5월 9일 중 하루로 결정된다. 지난 15일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5월 9일을 제19대 대통령 선거일로 확정했다. 징검다리 연휴가 펼쳐지는 5월 첫째 주는 선거일로 지정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마지막 날인 9일을 선거일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Q 박 전 대통령은 구속될 것이다?
A 검찰 조사 후 알 수 있다. 다만 검사 출신 김경진 국민의당 수석대변인은 박 전 대통령의 구속 가능성을 99%로 내다봤다. 현재 박 전 대통령은 재단법인 미르와 K스포츠 등에 대한 대기업 출연, 블랙리스트 의혹, 정부 기밀문서 유출 등 13가지 사건과 관련해 뇌물수수, 강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공무상 비밀 누설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정·재계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모두 구속된 만큼 어느 때보다 박 전 대통령의 구속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Q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변호인은 ‘골수 친박’이다?
A 대표적 친박이다.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 퇴거 이후 삼성동 자택에서 유영하 변호인을 맞았다. 유 변호사는 대표적 ‘친박’으로 지난해 11월 검찰 수사를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을 맡기도 했고 탄핵 심판 당시에도 박 전 대통령의 법률 대변인 역할을 일임한 바 있다. 이는 검찰 수사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3월 18일 오전 9시 17분경 박 전 대통령 자택에 들어간 유 변호사는 같은 날 오후 5시 35분쯤 나와 현장을 빠져나갔다. 유 변호사는 “최태원 검찰 소환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어떻게 반응했나” 등의 취재진 질문에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다.
숫자로 본 탄핵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얽힌 우연의 일치가 곳곳에서 보인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을 당시 표결에 불참한 인원은 1명이고 찬성표를 던진 의원 234명, 반대표를 던진 의원 56명, 무효표 7명으로 완벽하게 1, 234, 56, 7의 숫자가 이어진다. 여기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발의된 날인 8일과 탄핵안을 가결한 날인 9일에이어 헌재의 탄핵 심판 결과가 10일 오전 11시로 정해지면서 1~11까지의 완벽한 탄핵 관련 숫자가 완성됐다. 우연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탄핵 심판 선고일인 3월 10일이 음력으로 2월 12일로, 이날의 60간지가 바로 ‘병신(丙申)일’인데, 지난해가 ‘병신년’인 것에 이어 대통령 선거일인 5월 9일도 음력으로 ‘병신일’이다.
역사 속 탄핵
이승만 초대 대통령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을 탄핵한 첫 사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42호에는 이승만의 탄핵 사유가 이렇게 적혀 있다. “이승만은 외교를 구실로 하여 직무지를 마음대로 떠나 있은 지 5년에, 난국 수습과 대업의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황된 사실을 마음대로 지어내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켰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은 1925년 3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을 결의하고, 23일에 면직시켰다. 그리고 23일 곧바로 박은식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소추안 가결은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있었다. 당시 국회는 국법 질서 문란 행위로 언론사 등과의 인터뷰 중 특정 정당을 지지한 행위와 헌법기관을 경시했다는 점을 들고, 권력형 부정부패 연루 혐의, 국정 파탄의 책임 등을 탄핵 사유로 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가 잇따랐고, 헌법재판소는 법률 위반은 일부 인정되지만 대통령을 그만두게 할 만큼 중대한 사유라고 할 수 없다고 하여 기각했다.
연산군과 광해군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비슷한 탄핵 사건이 있었다. 대신 관료들에 의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 주인공이다. 연산군은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패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왕에서 끌어내려졌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등극한 사건을 말한다. 명·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친 공이 인정되면서 평가가 다소 좋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폐위된 왕으로 평가받는 광해군도 있다. 광해군이 왕에서 쫓겨난 이유는 <인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정치를 뒤로하고 초야로 숨어버린 것, 토목 공사를 크게 해 백성에게 고통을 안겼다는 것, 벼슬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이루어졌다는 점 등이다.
해외 대통령 미국의 경우 1868년 공무원 임기법 위반으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탄핵소추(부결)된 것을 비롯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사임), 1998년 성추문과 위증으로 빌 클린턴(부결) 등이 있다. 실제 탄핵이 결정된 경우는 없으나 대통령 임기 중 탄핵소추를 당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브라질의 페르난두 콜로르 지멜루는 1990년부터 대통령으로 재직했으나 1992년 독직 및 부패 혐의로 탄핵 절차가 진행되자 사임했다. 에콰도르의 압달라 부카람과 루시오 구테헤스가 탄핵됐고,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파라과이의 페르난도 루고, 인도네시아 압루라만 와히드, 베네수엘라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등이 탄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