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을 막 끝낸 남궁민을 만났을 때다. 그의 악역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고, 시도와 도전을 멈추지 않는 행보에 박수가 이어지고 있었는데도 덤덤하던 그의 표정이 기자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았다. 하지만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평가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결연함으로 보였다. 원래 하는 대로만 연기하겠다던 그가 <미녀 공심이>를 거쳐 KBS2 드라마 <김과장>으로 돌아왔다.
남궁민은 이번 드라마에서 경리부 과장 ‘김성룡’(김과장)이라는 예측 불가 캐릭터로 변신했다. 비상한 두뇌와 돈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일명 ‘삥땅’과 ‘해먹기’의 대가이자 현란한 언변과 근성을 지닌 인물이다. 남궁민은 지방 조폭의 자금을 관리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대기업의 경리부 과장으로 들어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김성룡’ 역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공감과 통쾌함을 선사하고 있다. 매회 쏟아내는 ‘김과장표’ 대사들이 압권이다. <김과장>은 제작비 2백억원의 대작으로 알려지며 기대작으로 손꼽히던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를 꺾었다. 시청률 7.8%로 시작해 20%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역대급 역주행’이다. 그 열풍의 한가운데 남궁민이 있다. 쫄깃한 연기로 드라마의 타이틀 롤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평가다. 남궁민은 인기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과장>의 인기 비결은 편하게 웃고 즐기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복잡한 시대에 어렵지 않은 드라마잖아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스토리 덕분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반응이 좋아서 그런지 촬영 현장도 즐겁고 활기찹니다. 배우들도 모두 웃으며 촬영하고 있죠. 시청자분들도 훈훈한 촬영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바쁜 촬영 일정이지만 좋은 연기로 보답하고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전작 <미녀 공심이>와 같은 코미디 장르라 선뜻 용기가 나지 않던 것도 사실이다. 배우가 보여주어야 하는 연기의 진폭이 크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남궁민이 <김과장>을 선택한 건 전적으로 제작진에 대한 믿음이었다.
방송 전 기자들과 만난 남궁민이 입을 열었다.
“작년에만 다섯 개 역할을 연기했더라고요. 아무리 다르게 하려고 해도 비슷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번 작품에 출연하는 게 맞는 걸까 고민했는데 박재범 작가님에 대한 믿음이 컸어요. 감독님과 말이 잘 통해 호흡이 좋을 거란 생각이 들어 출연을 결정했죠. 연기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스트레스도 컸고요. 머리 염색을 했고 말을 빨리 하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언제 악역을 연기했었나 싶을 정도로 코믹 연기가 잘 어울린다. <미녀 공심이>와는 결이 다른 코믹 연기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 캐릭터가 남궁민을 만나 팔딱팔딱 뛰고 있다.
“악역을 할 땐 무섭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요즘엔 얼굴만 봐도 웃기대요. 캐릭터 연구를 많이 한 덕분인 것 같아요. <미녀 공심이>가 로맨틱 코미디였기 때문에 두 캐릭터 사이에서 차별화를 꾀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직도 ‘김성룡’을 연구 중입니다.”
후배 배우들의 칭찬도 이어지고 있다. <미녀 공심이>에서 함께 호흡한 민아와 서효림은 직접 촬영장에 선물을 보낼 정도로 열렬한 응원군이다. <리멤버>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정혜성도 칭찬에 입이 마른다.
“<리멤버>에서는 보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고 있어요. 당시엔 화내고 소리 지르는 모습만 봤거든요. 굉장히 유연하고 유머러스하며 재치가 있는 분이라는 걸 이번 작품을 하면서 알게 됐죠. 다양한 색깔을 가진 선배인 것 같아요.”(정혜성)
극중 희대의 악역 ‘서율’ 역을 맡은 이준호가 말을 보탰다.
“남궁민 선배님이 전작에서 악역을 잘해주셔서 부담이 되고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캐릭터에 최대한 몰입하려고 해요. 평소에 아는 사람들 만나더라도 가능하면 ‘서율’이라는 캐릭터로 있으려고 노력하죠.”(이준호)
지금은 흥행 보증 수표라 불리지만 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다. <내 마음이 들리니> 종영 이후 2년이라는 공백기는 그를 더욱 단단한 배우로 성장시켰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어요. 공백기를 갖자는 생각으로 쉬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제가 잊히더라고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배우가 됐죠. ‘아무리 사랑받아도 잊힐 수 있구나, 배우는 그런 직업이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어요. 인기요? 한두 달이면 잊혀요. 그래서 게으름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영화 <라이트 마이 파이어>를 연출했다. 25분짜리 단편영화지만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궁민은 그렇게 ‘감독’이라는 새 이름표를 얻었다.
“영화 제작은 어린 시절 제 꿈이에요. 돌이켜보면 동생과 함께 영화를 보고 좋아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는 꼭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돼야지’라고 생각했고 쉬면서 도전했죠. 감독으로도 인정받고 싶어요.”
그의 첫 작품에는 남궁민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다. 기획부터 캐스팅, 촬영, 편집까지 어느 것 하나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동휘 씨에게 직접 연락해 캐스팅했어요. 흔쾌히 출연해주었고요.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엄청 욕먹었던 것처럼 욕먹을 각오로 하자고 생각했어요. 떨리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제 적성에 맞더라고요.(웃음)”
연출 경험은 그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연기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법을 터득했고 촬영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반성했다. 상대 배우를 이해하는 방법도 배웠다.
“감독님들이 어떤 고민을 하며 연출하는지 이해하게 되니까 배우로서 연기할 때 더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연기 내공의 중요성도 깨달았고요. 연기자 출신 감독이라는 타이틀에 편견을 가질 수 있는데, 그걸 깨는 게 제 목표예요.”
만년 조연으로 머무는가 싶던 남궁민이 어떤 연기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며 배우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그리고 마침내 타이틀 롤을 거머쥐었다. 지금은 남궁민에 의한, 남궁민을 위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