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목소리로 인사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희경에게선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 보이던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도착해 스태프 한 사람, 한 사람을 챙기는 그녀에겐 상냥하고 친근한 '언니'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달까. 막내 스태프의 별명까지 기억하는 세심한 면모로 차원이 다른 내공을 보여주는 진희경과의 만남은 삼복더위가 시작되는 초복의 한낮에 이뤄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진희경의 곁에는 조카 아리 양이 있었다.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 양은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한눈에 봐도 '어여쁜' 소녀다. 미국에 살면서 엄마에게 배운 짧은 한국말로 "이건 뭐예요?" "이건 이렇게 해야 하는 거죠?" 하며 조잘조잘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위 속에서도 두 사람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포즈를 취했다. 모델 출신 진희경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9살짜리 꼬마에겐 고문과도 같았을 날씨였음에도 아리 양은 이모의 포즈를 곧잘 따라 했다. 이모의 끼를 영락없이 물려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수줍음이 굉장히 많은 아이인데 잘 따라와줘서 고마워요.
아리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더 많은 추억을 만들거에요.
조카와 함께하는 화보, 조금은 색달라요.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온 아리에게 '아무도 할 수 없는 우리 둘만의 추억을 만들어주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근에 자선 패션쇼에도 함께 올랐죠. 아리가 처음에는 긴장하더니 쇼가 시작되니까 그 무대를 즐기는 거 있죠? 모델 출신인 저보다 더 워킹을 잘했다니까요. 오늘 화보도 마찬가지예요. 더운 날씨에 야외 촬영이라 걱정했는데 잘 따라와줘서 다행이에요. 아리와 저만의 추억을 또 하나 만들 수 있어서 좋아요.
아리 양이 굉장히 예뻐요. 연예인 해도 될 만한 외모인데…. 사람들이 아리보고 예쁘다고 하면 괜히 제가 으쓱해요. 내가 낳은 딸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요. 연예인요?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보겠다고 하면 말리진 않겠지만 연예인을 할 수 있을까 싶어요. 수줍음이 굉장히 많은 아이거든요. 그런데 지난번 패션쇼와 오늘 화보 촬영에서 곧잘 해내는 걸 보면서 내심 기대도 되더라고요.
촬영 전에 보니 아리가 이모 곁을 떠나지 않더라고요. 이모가 하는 건 뭐든 해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많은 소녀랄까요. 동생이 임신했을 때부터 저와 지냈는데, 아리가 두 살이 되던 해까지 한국에서 같이 키웠어요. 24개월을 채우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얼마나 아쉽고 서운했는지 몰라요. 아이가 가장 예쁜 시기를 함께 보내서 그런지 다른 조카들보다 정이 많이 들었어요. 그 후로 아리는 샌프란시스코, 피츠버그, 볼티모어에서 살았는데, 아리와 제가 번갈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만났네요. 이번에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거라 온 마음 다해서 잘해주려고 해요. 아리도 자기 엄마보다 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웃음)
'진희경은 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처음 만난 기자를 살뜰히 챙겨주는 것도 그렇고, 주변 사람과도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어요. 모든 게 내 중심으로 돌아갔던 과거와 달라졌죠. 욕심을 버리니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더라고요. 저는 카메라 안과 밖에서 늘 빛나는 직업이잖아요. 오늘만 해도 그래요. 이 무더위 속에 스무 명 가까운 스태프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데, 그게 모두 저를 빛나게 하기 위함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챙기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말 한마디라도 친절하게 하려 하고 마음을 다해서 예뻐하려 하죠. 관계를 계산하지 않고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오랫동안 함께 같이한 스태프가 많네요. 현재 소속사 대표가 18년 전 매니저와 배우로 만난 친구예요. 처음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저를 배우로, 그리고 인간 진희경으로 존중해주고 응원해주는 친구죠. 저 또한 그 친구의 마음을 고맙게 생각해요. 회사 대표가 잘되는 게 제가 잘되는 길이잖아요. 그렇게 서로 존중하다 보니 트러블이 생길 일이 없어요. 회사 대표가 하는 말은 왠지 귀담아 듣게 되더라고요.(웃음) 스타일리스트나 헤어·메이크업 스태프도 오래 같이 일한 친구들이에요.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는 멋진 친구들이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면 그들에게서 좋은 에너지를 받고, 그 에너지를 남에게 전해줄 수도 있으니까 좋아요.
자주 스태프가 바뀌는 배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말이네요. 때에 따라 더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 다른 스태프와 작업하는 경우가 있을수도 있죠.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주변 환경부터 변화를 주는 배우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잘못된 거라고 비난할 순 없지 않을까요? 새로운 스태프와 더 잘 통하고 마음이 잘 맞을 수도 있잖아요.
1989년 모델로 데뷔해 올해로 데뷔 28주년이 됐어요. 후회했던 순간은 없었나요? 글쎄요. 뒤돌아보고 후회하는 성격이 아니라 낙담하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아요. 그렇다고 진취적인 스타일도 아니고요. 제가 선택한 삶이기 때문에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재미있고, 저는 제 직업을 사랑하거든요.
어쩌면 배우에게 적합하지 않은 성격일 수도 있겠네요. 배우로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없나요? 평소에 어떤 목표나 꿈을 정해놓고 그걸 향해 달려가는 편이 아니라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사실 없어요. 다만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죠. 배우는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에요. 콘셉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나의 쓰임이 달라지죠. 그런 면에서 좋은 쪽으로 쓰였으면 좋겠어요. 괜찮은 사람, 괜찮은 배우라는 평가를 받고 싶은 욕심은 있어요. 사회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요.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면서 알콩달콩 그렇게 살고 싶어요.
괜찮은 사람, 괜찮은 배우라…. 상식이 있는 사람이죠. 우리가 교육 받아온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상식을 지키는 사람이 좋아요. 지식이 많고 적음, 돈이 많고 적음이 그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돼요. 좋은 인성과 건강한 마인드, 그리고 건강한 체력까지 삼박자가 갖춰진다면 괜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괜찮은 배우가 되기 위해선 먼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않으면 결국 외면당하게 되어 있거든요.
모든 사람에게 괜찮은 사람이 될 순 없잖아요. 사람과의 관계에도 노하우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저도 어느 집단에서 막내일 때가 있었고, 중간자 역할일 때가 있었는데, 그 과정을 지나오면서 내가 중심을 잘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순 없어요. 다만 내가 중심을 지키고, 나 스스로 나를 지키면 결국 사람들도 나를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또 어떨 때는 밀어붙일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로는 빨리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요. 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건 낙천적인 성격이에요. 힘들 때일수록 '다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연습을 하는 거죠.
'내 길을 간다'는 요즘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그려낸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 출연했어요. 사람들의 시선보다 나를 대하는 나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었죠. 편집돼서 시청자들은 볼 수 없었지만 저 자신에게 자극이 되었던 대사가 있어요. "나의 마인드는 가시밭길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가시밭길에서 신나게 간다"는 대사였죠. 젊었을 때 저는 힘들고 슬픈 걸 이겨내지 못한 채 길을 걸어야만 했다면, 요즘 젊은 친구들은 가시밭길에서 뒹굴어 피가 나도 신나게 걸어가죠. 부딪히고 상처가 나고 아물면서 성장하더라고요. 그럴 수 있는 방법을 저도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젊은이들의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도 큰 공감을 얻었죠(극 중 박서준과 김지원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면서 생기는 묘한 감정을 연기했고, 안재홍과 송하윤은 6년 차 연인의 권태기를 현실감 넘치게 그려내면서 공감을 얻었다). 울면서 봤다는 시청자도 많아요. 저도 매회 울었어요. 6년 차 연인의 이야기 속에 오래된 연인들이 느낄 수 있는 디테일이 잘 살아 있었죠. 여자 사람 친구, 남자 사람 친구가 애인이 되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설렘도 아주 잘 담겼어요. 후배들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저도 많이 울고, 웃었네요. 오랜만에 설레는 감정으로 연기한 시간이었어요.
진희경 씨의 역할도 임팩트 있었어요(진희경은 극 중 나이도 출신도 추정 불가한 미스터리한 여인 '황복희' 역을 맡았다. 황복희가 김지원의 친모라는 반전 설정이 화제가 됐다). 처음에 대본을 받았을 땐 '그래서 대체 내가 어떤 역할인 거지?' 싶었어요. 미스터리한데, 조력자 역할을 하잖아요. 대체 어떤 캐릭터일까 하는 호기심이 있었고,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 언제 또 이런 캐릭터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요. 저를 캐스팅해준 감독님과 작가님께 무한 감사한 마음입니다.
드라마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네요. 일단 대본이 너무 재미있으니까 애정이 생길 수밖에 없죠. 이해 안 되는 캐릭터, 이해 안 되는 상황을 연기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럴 땐 배우로서 정말 힘들거든요. 이번 작품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 상황에 몰입이 되고,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게 되니까 좋더라고요. 일주일에 두 번씩 부산에 내려가 촬영하는 고된 일정임에도 촬영하는 날이 기다려졌을 정도니까요.
남편분의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드라마 출연을 고민할 때 남편이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매니저의 설득에도 고민하던 저인데 남편의 한마디에 출연을 결심했네요. 남편은 직업 특성상 해외에 자주 나가 있는데, 이번 드라마 촬영 기간 중엔 한 달간 유럽에서 지내야 했어요. 드라마 촬영 때문에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했는데 남편이 출장을 가니 마음이 조금은 놓이더라고요.(웃음) 남편은 출장 중에도 열심히 모니터를 해주었죠. 드라마가 딱 끝나니까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네요. 이런 게 운명 아닌가요?(웃음)
남편 이야기를 하니 애교가 절로 묻어나네요. 평소에도 사랑스러운 아내일 것 같아요. 남편이 자주 해외에 나가 있다 보니 함께 있을 때 더 잘하려고 해요.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혀 짧은 소리가 나곤 하죠. 결혼하면서 애교에 눈을 떴다고 할까요. 내 안에 숨어 있던 애교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네요. 그런 저를 보면서 주변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는데, 그런 반응을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누가 뭐라고 하면 어때요. 내 남편에게 내가 애교 부리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요.(웃음)
10년 전, 마흔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어떤 가정을 꾸려야겠다는 로망이 있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만 지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남편이 저를 많이 배려해주고 믿어준다는 걸 알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려고 하니 그게 시너지가 돼서 돌아와요. 세상에서 나만큼 남편을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는 걸 남편도 알고, 저도 남편만큼 저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소중한 관계죠. 배려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면서 알콩달콩 그렇게 살고 싶어요. 지금처럼요!
절반 정도 남은 올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할 계획인가요? 계획 없어요! 무계획이 계획이죠. 그 안에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괜찮아요. 제게 주어진 그 시간을 알차게 쓸 자신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