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인터뷰 - 1990년 12월호 우먼센스〉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의 분규가 표면화되면서 다시 ‘최태민 미스터리’가 문서화되고 있다. 처음에는 박근혜씨와 근영씨 자매간의 갈등인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던 기념사업회 분규는 차츰 시간이 지나며 최태민씨에게로 모든 원인이 집중되고 있는 양상이다.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으며, 온갖 추측과 소문만으로 존재해왔던 최태민씨.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일부의 주장대로 희대의 사기꾼인가 혹은 외로운 박근혜씨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순수한 조언자인가? 본지가 최초로 최태민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실체에 접근해 보았다.
기념사업회 분규가 표면화하자 다시 떠오른 ‘최태민 미스터리’
지난 한 달 동안 서울 능동에 위치한 어린이회관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어린이회관을 운영하는 육영재단과 회관 안에 있는 고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의 분규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기념사업회와 육영재단의 분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10월 28일 어린이회관 정문 앞에서 있었던 데모에서부터였다.
이날 시위는 최태민 목사 규탄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시위를 주최한 것은 숭모회라는 조직이었는데 이날에야 비로소 일반에게 알려지게 된 단체였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삐끄덕거림은 이날부터 있었다. 시위에 참석한 일부 사람들은 애초에는 박근혜씨(38세) 등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되더니 소문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구구한 소문의 요지는 박근혜씨와 근영씨(36세) 자매의 불화설이었다. 가족 간의 갈등과 불협화음을 가장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진 근혜씨는 소문을 불식시키려는 듯 급기야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기념사업회장직을 사퇴하고 근영씨를 후임으로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11월 3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근혜씨를 지지하는 측과 숭모회 등 간의 알력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두 번의 공식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형제간의 불화는 터무니없는 얘기다. 이제 기념사업이 궤도에 올랐고 피곤하므로 동생에게 일을 맡기겠다’면서 사태를 진정시키려던 근혜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근혜씨의 돌발적인 사퇴 배경을 의심하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이야기가 퍼져 나왔다. 추측은 자매간의 불화설로부터 유력 정치인 등의 배후 개입설로까지 증폭되었다.
한편 숭모회 측은 박근혜씨에게 자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씨를 일관되게 비난해왔다. 비난내용의 골자는 최씨의 육영재단 운영에 있어서의 간섭과 전횡이었고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공격도 포함돼 있었다. 기념사업회 분규가 복잡해질 즈음 숭모회 측은 ‘우리의 요구는 박근혜 이사장의 퇴진이 아니라 최태민씨의 퇴진’이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한편 우여곡절 끝에 육영재단 이사장직에 취임한 박근영씨는 취임식날 기자들과 잠시 만난 자리에서 최태민씨의 혐의 사실을 믿으며 언니는 속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됐다. 결국 표면적으로 드러난 육영재단․기념사업회 분규의 원인은 최태민이라는 미스터리 인물에게로 모아지고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한 달 여 동안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분규에 원인을 제공할 만큼 그는 역량있는 인물인가? 최태민씨에 대해선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의 나이만 해도 매체마다 78세, 69세 등으로 제각각 보도됐다. 시중에 나도는 사진도 대머리에 안경을 끼고 웃는 표정인지, 심각한 모습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흐릿한 흑백 사진 1장이 유일했다.
기념사업회 나온 뒤 생긴 일이므로 분규에 신경쓰지 않으려고 한다.
난무하는 소문과 추측으로만 존재했던 최태민씨. 그에 대한 자료도 유신 시절 그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았다는 이른바 ‘수사 기록’ 뿐인데 이 수사 기록으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항간의 갖은 추측(대부분은 악의적인 것이지만)에도 최태민씨는 침묵을 지켜 왔다. 박근혜씨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진 75년 이래로 그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미스터리는 더욱 깊어갔다.
이번의 분규가 발생한 뒤 기자는 여러 채널을 통해 최태민씨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답변은 한결같이 '인터뷰 불가'였다. 그의 실체 파악을 통해 기념사업회 분규의 원인을 알아보려던 기자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 한 도시에 칩거해 있던 그의 소재를 알아내고 전화 통화에 성공함으로써 그의 목소리에 의한 그 자신의 ‘정체’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수차례에 걸친 최태민씨와의 전화 인터뷰와 가족 등 측근들의 증언을 정리한 내용이다. 최씨에 대한 호칭은 편의상 목사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육영재단과 기념사업회의 분규가 벌어지면서 최목사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박근혜 이사장이 현직에서 물러난 지금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근혜씨는 최목사께서 이미 몇 달 전부터 기념사업회 등에서 손을 뗐다고 말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사태’를 보는 심경은 착잡할 것 같습니다. 우선 이번 일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내가 나온 뒤에 생긴 일이므로 신경 안 쓸려고 합니다.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뒤에 나오는 얘기지만 최태민씨는 현재 78세이다. 지난 88년 12월 박근혜씨와의 인터뷰를 섭외하러 기념사업회에 갔던 기자는 한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그와 우연하게 만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76세였을 때인데 고령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중키에 살이 찌지 않은 적당한 몸매, 꼿꼿한 허리와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 등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에게서는 ‘도사’ 혹은 ‘최면술사’ 같은 소문에서 전해지는 신비스럽거나 비범한 분위기보다는 복덕방이나 공원 등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함이 전해졌다.
그때는 최태민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번에야 처음 들을 수 있었다. 고령의 나이를 느낄 수 없는, 한 50대쯤의 목소리 같은 건강함이 배어 있었다. 측근들에 따르면 보청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시력도 좋은 편이라고 한다. 그의 말은 짧았다. 군더더기 설명을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성격 같았다. 거의 ‘예’와 ‘아니오’만을 말하려는 그의 말투에는 어떤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투는 독선적이라거나 독단적이라는 비난을 들을 소지가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고소라는 원치 않던 방법을 택했다.
-기념사업회 등에서 손을 뗐다면 언제, 어떤 자리에서 물러난 것입니까?
“지난 8월 하순부터 물러났습니다. 여러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은데 원래 내게는 개인 사무실도 없었고, 아무런 결재 권한도 없었어요.”
-그러면 최목사께서는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기자가 기념사업회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데 출․퇴근을 했던 것이 아닌가요? 구체적으로 밝혀 주십시오.
“나는 박근혜 이사장의 자문 역할에 그쳤어요. 박이사장이나 기념사업회가 나와 의논할 일이 생기면 손관장(이번에 물러난 어린이회관 손미자 관장 지칭)이 연락해주었고… 부정기적으로 나갔던 셈이지.”
최씨는 기념사업회에 나가도 어린이회관 직원들과는 거의 대면하지 않았다는 것이 측근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기념사업회 사람들과는 가끔 만났으며 만나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기념사업회 조직이라는 것이 원래 7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새마음봉사단의 조직을 복원시킨 것이고 최씨는 그 조직 구성원의 일원이자 구심점이었으므로 최씨가 기념사업회 인사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 한편 최씨가 근혜씨를 도와준 자문내용은 아직은 구체적인 사항을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근혜씨가 기념사업회 조직을 만들면서 조직을 활성화할 방안에 대해 자문을 구하면 서로 의견을 교환해 합일점을 찾아가는 식이었으며 근혜씨가 박대통령의 명예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로 속상해하면서 해결점을 찾으면 최씨가 ‘재료가 있소? 이렇게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며 방법을 제시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최씨가 제시한 방법이나 자문 내용이 모두 채택됐다면 항간의 표현대로 ‘배후 조종자’일수도 있겠으나 근혜씨가 그럴 정도로 자기 판단력이 없는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측근들은 주장한다.
-박근혜씨와 15년 가량 알고 지낸 사인데 서로 존대말을 씁니까? 최목사께서 나이가 많으니까 낮춤말을 사용하지는 않나요?
“박이사장과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피차 경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기념사업회를 왕래하면서 자문 역으로서의 월급을 받으셨나요?
“그런 적 없습니다.”
-이번에 최목사 측에서 고소를 제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목사에 대한 비난이 어제, 오늘에 있었던 일이 아닌데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왜 이번에 고소를 결심했습니까. 또 고소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려주시죠.
“이전에 나온 기사들은 워낙 제 멋대로 쓴 것이니까 신경을 쓰지 않았죠. 그러나 이번에는 육영재단과 기념사업회를 인도하는 아름다운 일도 고약하게 쓰고 있으니까 고소하게 된 것입니다. 또 나는 이미 물러나있던 상탠데 전횡을 일삼으니 퇴진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야 늙었으니 상관없다고 해도 내게도 딸들과 사위들이 있는데…차제에 진실을 규명해보자는 결심을 한 것이죠.”
최씨는 사실 기념사업회의 분규가 발생한 뒤에도 이미 자신이 물러난 뒤였으니까 조용히 있다가 여생을 마칠 생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공격’이 너무 집요해 고소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고소는 11월 말 중에 제기될 것인데 우선 언론매체가 그 대상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고소가 예정돼있던 주간지 1개와 월간 여성지 1개는 서로의 시각 차이가 해소돼 취소됐다. “한 가지 부연한다면 나는 아직도 좋은 방향으로 일이 매듭지어지길 원해요. 싸우려고 하는 고소가 아닙니다. 언론이 자제해주길 바래요.”
77년도에 작성된 수사기록은 박대통령의 ‘친국’에서 무혐의 처리
-최목사에 대해선 갖가지 설과 추측이 난무해왔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가지 소문들을 확인하면서 사실 여부를 가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최목사에 대한 갖은 추측의 기본 자료는 이른바 중앙정보부의 수사 기록입니다. 조사 받은 시기와 조사 내용을 들려 주십시오.
“그게 77년에 작성된 수사 기록이에요. 원래는 나돌아 다닐 수가 없는 것이죠. 수사 결과 내가 기소된 뒤 기소 중지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던 것이 아니라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받았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시죠.
“그런 것 밝히면 곤란해요.” 최씨는 조사받던 상황을 밝히길 거부했지만 그 조사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77년 9월 최목사는 위출혈로 고려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병원에 입원 중인 상태에서 최목사는 수사관들의 조사를 받았다. 외부, 특히 박근혜씨와는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일종의 감금 상태였다는 것이 측근들의 주장이다.
측근들은 당시 최목사가 순순히 기술한 자술서를 토대로 수사 기록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문 형식으로 기록이 꾸며졌다고 한다. 수사는 목적성 있는 신문 내용에 긍정의 대답을 듣고서야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고 측근들은 강조한다. 즉 강압에 의해 수사 기록이 꾸며졌다는 것이 최씨 주변의 주장이다.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결론은 누가 내렸나요? 당시 중정부장이던 김재규씨였습니까.
“웬걸. 박대통령이었지.”
-박대통령 앞에서 이른바 ‘친국’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사실대로 얘기했는데 ‘없었던 일’ 처분을 받았단 말입니까.
“생각해보시오. 당시 박대통령이 어떤 분이었소? 그분 앞에서 조사를 받는다면 바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소상히 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고려병원에 입원중일 때 불려나가 받은 ‘친국’ 자리에는 박대통령과 최태민씨, 근혜씨만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근혜씨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분위기는 진지하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박대통령은 중정에서 올라온 적지 않은 분량의 수사 기록을 넘기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최씨에게 물었다. “이런 일 있습니까?”“그렇소?”식으로 따져나갔다. 신문은 1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당시 최태민씨와 근혜씨가 조직했던 새마음봉사단은 여성 회원 수만 5백만에 이르렀다. 최씨가 조사받은 것은 비대해진 조직 때문이었다. 직접 조사를 진행하며 박대통령은 새마음봉사단이 이권운동한 단체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 이권에 개입했다면 돈이 나와야 하는데 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씨의 생각이다. 최씨는 “당시 봉사단 지부장 등의 청탁이 제법 들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권을 찾아 움직이질 않았었다”고 주장한다.
육영수 여사는 만난적 없으며 최면술은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박근혜씨를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을 들려주시죠. 일설에는 최목사가 근혜씨에게 ‘육여사가 꿈에 나타나셨다’ 운운의 편지를 보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이니까 자꾸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75년 초였을 겁니다. 육여사가 돌아가신 뒤 위로하는 내용의 편지는 보냈었죠. 그 내용을 지금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육여사 현몽’이라거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하는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어요. 아마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로 편지의 끝을 맺었지. 그 편지를 본 박이사장이 불러줘 만나게 된 것이고…. 생각해보시오. ‘현몽’ 등의 말이 대학교육을 받은 박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
-육여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숭모회에 관련된 한 인사는 최목사가 육여사 앞에서 경호원 두 명을 대상으로 최면술 시범을 보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만나요? 꾸미려면 좀 그럴 듯하게 꾸미지, 그렇게 졸작밖에 못 만들어내나. 육여사는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어요.”
-최면술은 정말 하십니까? 또 안수기도로 병 고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기가 막힌 듯)허허 내 참…. 어떻게 하는 것이 최면술인지 몰라요. 그리고 병은 의사가 고치지 왜 내가 고쳐요. 나는 어딜 가든지 얘기합니다. 목사, 전도사, 중들이 왜 병을 고친다고 하느냐고요. 본인의 마음이 돈독하고, 신심이 강하면 정신력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병은 의사가 고쳐야지.”
‘박근혜씨가 최씨의 최면술에 걸려 있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사실을 부인하는 현시점에서 그런 소문의 진위를 더 캐보기는 어려우나 한편에선 ‘박근혜씨와 최태민씨의 상호신뢰에 이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77년 최씨가 중정으로부터 받은 수사기록은 근혜씨도 볼 수 있었다. 기록 중에는 근혜씨가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들어 있을 수도 있었다.(여기에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수사 기록이라는 것을 인용하면서도 정작 그 실물을 본 사람은 몇 안된다는 것이다. 기자 또한 그 실물을 아직 못 본 까닭에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공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당시 근혜씨는 수사기록을 보는 순간 ‘최목사가 이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박대통령에게 직접 만나볼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근혜씨가 보여준 신뢰를 최씨는 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5공화국이 들어선 뒤 근혜씨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었다. 근혜씨가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공개적인 박대통령 추모 행사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었다. 또 근혜씨 보기에 아버지의 위신이 유린되는 3공화국의 비사들이 들춰지기도 했다. 근혜씨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있던 사람도 떠나가는 형국이었고 도움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때도 근혜씨 주변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 최씨였다. 최씨는 자신이 받았던 신뢰만큼 근혜씨에게 믿음과 정신적인 안정을 주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기념사업회 인사는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상호 신뢰가 더욱 다져졌다고 주장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목사이며 검도 7단의 실력으로 건강 유지
-항간에는 최목사의 이름이 7개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3번 개종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진위를 밝혀 주시죠.
“내가 1912년생입니다. 우리 세대만 해도 본명 외에 아명도 있고, 자도 있고, 호도 있었습니다. 7개가 되지도 않지만 이런 것이 7개라면 또 몰라도…. 이름이 7개씩이나 된다는 것은 터무니없어요. 더욱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때마다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 모양인데 말도 안 돼요. 내 호로 퇴운(退雲)이 있었어요. 시기가 정확히 기억 안나는데 내가 ‘입산수도’하고 있던 시절에 월남한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가호적법이 만들어졌어요. 그때 나를 알던 사람이 멋대로 호적에 퇴운을 이름으로 올렸더군요. 호로 쓰던 것이어서 75년에 태민(太敏)으로 개명했죠. 호적상의 개명은 이것뿐입니다.”
-방금 입산수도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런 점 때문에 이른바 도사로 알려진 것 아닙니까?
“아, 그럼 기도하러 산으로 가지 바다로 갑니까? 나는 계룡산은 커녕 설악산도 안가봤어요. 가족과 놀러 속리산은 가봤네요. 우리 집안은 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집안이에요.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고 딸 네 명 모두 교회에 나갑니다.”
측근에 따르면 최목사의 말투는 워낙 이렇다고 한다. 산 등에 요양 차 쉬러 가는 것을 입산 수도 식으로 표현한다는 것. 오해를 살 염려가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해도 최씨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가족 관계를 들려 주시죠.
“황해도 봉산에서 났습니다. 형제가 3~4명 있었는데 다 죽었어요. 이제 나 혼자고 게다가 월남한 신세여서 친척도 없습니다. 지금은 딸만 넷이 있습니다. 최씨의 아버지 최윤성씨는 금년 정부로부터 독립 유공 훈장을 받았다. 독립운동자금책으로서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되기도 했던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최태민씨가 일제 시대에 순사로 근무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정부가 훈장을 수여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어린 시절 독립운동하는 아버지를 둔 관계로 집의 재산은 탕진됐다고 한다. 논과 밭두렁에서 자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월남한 뒤 부산에서 건국대학이라고 불리던 건국의숙을 마쳤다. 전공은 법과였다. 건국 의숙은 뒤에 없어지면서 동아대학교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공무원이나 회사원 등은 적성에 맞지 않아 주로 사업을 했다. 서울에 올라온 뒤 주로 산 지역은 서대문구. 강남에서 유치원을 운영하는 셋째딸(34세)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현재의 기상대 부근에 정원이 있는 2층 양옥집에서 살았으며 자가용으로 집차가 있어서 기사를 부린 기억이 있다고 한다.
최씨는 현재의 부인(71세)과 피난지인 부산에서 연애 결혼했다. 당시 최씨는 호적이 없었고 가호적법이 만들어지면서 늦게 혼인 신고를 했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재혼이니, 어쩌니 하는 것 같다고 측근은 해명했다.
-목사 자격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목사 안수는 언제 받았습니까? 신학교는 어딜 다녔는지…
“75년 1월 종합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75년 5월에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속한 신학교와 교단이 사이비라고 몰아칠텐데….”
-어린이회관 인사에도 관여했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나는 어린이회관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어요. 주로 한 일이 기념사업회의 자문 역할이었습니다.”
-현재 가진 재산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역삼동에 있는 집뿐입니다. 믿지 않겠지만 6~7년 전 그쪽 땅값이 오르기 전에 매입했소.”
-건강은 어떻습니까? 건강 유지의 비결이 있다면?
“혈압이 좀 높은 것 외에는 다 좋아요. 매 끼니 작은 공기밥 1그릇을 먹는 소식을 하고 있고, 검도를 12년째 하고 있습니다. 검도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검도 단체에서 7단을 받았죠.” 최씨는 새벽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기상해 검도를 40분 정도 한다고 한다. 마당 한 편에 나무봉이 박힌 쇠기둥을 박아놓고 그 봉을 죽도나 목검으로 치는 연습을 한다는 것. 그 외에는 별 취미가 없어서 골프, 바둑, 여행 등도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
-박근혜씨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대화가 되는 인물이죠. 그만한 여성도 없지 않아요? 내 개인적으로는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근영씨나 숭모회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 얘기는 하지 맙시다”
-앞으로의 계획은?
“해도 뭐이 돼야지. 이제는 조용히 지낼 생각입니다.
-더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려주시죠.
“내가 이 나이에 와서 누구를 원망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너무 어처구니없을 뿐이에요. 추호도 맞불질할 생각 없고,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박이사장은 재물욕도, 명예욕도 없는 사람”이라던 최태민씨는 “조용히 살 수 있도록 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길 바란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한편 지난 11월 27일 D일보는 ‘근혜와 근영사이…최태민씨는 누구’라는 제목 아래 최씨는 ‘4개교의 교리를 합친 영세교의 교주로 꿈에 나타난 육여사가 돌봐주라 했다며 75년 근혜씨에게 접근, 관계가 밀착’됐으며 ‘당시 청와대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각종 감투를 썼고 비리 소문에 정보부 조사를 받은 뒤 박대통령의 직접 신문을 받았다’는 내용과 ‘재단의 말단 직원 채용까지 승인하고 이름이 7개나 되며 분규가 나자 한달 전 시골 간다며 잠적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대해 최씨측은 “터무니없는 내용을 게재한 신문을 보고 최씨가 또 충격을 받았으며 대응책을 고려하고 있는 중”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해명인터뷰
갑자기 육영재단과 기념사업회에서 물러난 박근혜 “쓸쓸한 우리 형제, 비통한 사연을 말합니다”
지난 88년 10월부터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해 활발한 활동을 펴오던 박근혜씨가 기념사업회장직을 사임했다. 육영재단 이사장직까지 함께 물러난 근혜씨의 결정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어서 많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더욱이 최태민씨를 규탄하는 숭모회의 출현과 얼굴 공개를 꺼리던 근영씨의 등장으로 문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사퇴의 배경에 대한 여러 추측으로 어수선하던 11월 초 근혜씨는 기자들을 만나 그간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어머니가 설립한 육영재단을 동생이 맡는 것은 당연한 일
박근혜씨(38세)의 기자회견은 지난 11월 9일 오후 2시 40분경 어린이회관 안에 있는 육영재단 이사장실에서 이루어졌다. 근혜씨의 돌연한 공직 사퇴를 놓고 여러 추측이 무성한 가운데 ‘근혜․근영씨 자매의 불화설’이 가장 유력한 듯이 보이자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근혜씨가 자청한 기자회견이었다.
지난 88년 10월 기념사업회가 발족한 이후 기자는 근혜씨를 6번 가량 공식적으로 만났다. 만날 때마다 갖게 되는 인상적인 기억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였다. 미안한 표현이지만, 불의에 부모를 잃은 불행과 두 동생의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혼자 사는 여자가 그런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와 의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러나 항상 치밀한 목적 의식을 갖고 기자들과 신경전을 벌이던 근혜씨는 이날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 자신의 표현대로 ‘심신이 지쳐 있는’ 피곤한 모습이었다. 작은 산처럼 일종의 위압감마저 주었던 곧은 자세는 약간 꾸부정한 듯했고, 옆구리 쪽이 결린 듯 가끔 몸을 뒤로 젖히며 얼굴을 찡그리곤 했다. 조용한 가운데 힘이 담겨있던 목소리도 동요하고 있었다.
아마도 공식석상에서 근혜씨가 속마음을 보여주는 이런 표현을 하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너무 유명한 분이니까 피해를 당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팔자가 센 편이죠.” 88년 이래로 적지 않게 근혜씨를 괴롭혀 왔던 기자도 이날만은 처음으로 ‘근혜씨가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근혜씨와의 인터뷰 내용.
-현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점은 박근혜 회장의 사퇴 이유일 것입니다. 박회장은 건강을 사퇴의 이유 중 하나로 꼽기도 했는데 육영재단 및 기념사업회 구성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회장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건강은 너무 궁색한 이유 아닐까요.
“사실은 심신이 매우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지금도 빨리 인터뷰하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을 뿐입니다.” 근혜씨는 ‘일방적으로 매도되던 아버지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기 시작했고 기념사업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므로 그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후임을 여동생인 근영씨로 결정했는데 오히려 장자(長子)인 지만씨가 적격 아닐까요. 지만씨가 배제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업을 하고 있는 남동생은 스스로 기념사업회에서의 활동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육영재단은 어머니가 설립할 때부터 여동생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10월 28일 숭모회의 최태민씨 규탄 시위에서부터 이날의 근혜씨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에는 곡절이 많았다. 분규의 원인인 근혜․근영씨 자매간의 불화 혹은 재산 싸움인 것처럼 비쳐지자 가족 간의 내분을 가장 싫어하는 근혜씨는 11월 3일 전격적으로 공직을 사임했다. 그러자 다시 근혜씨 지지자들인 근화봉사단원 등이 근영씨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근혜씨는 사퇴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근영씨가 육영재단 이사장을, 김치열씨가 기념사업회장직을 맡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내무부장관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김치열씨가 기념사업회장에 선임된 것은 그동안 유족이 기념사업회를 맡은 사실에 대해 말이 많았던 것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사회의 결정 등 소정의 법적 절차는 이미 거쳤거나 혹은 차차 밟아나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80년 초 어려운 시기에 나를 도와준 사람은 최태민씨 뿐
-기념사업회 조직국장과 어린이회관 관장 등도 이미 사표를 낸 것으로 아는데, 그들이 박회장과 함께 그만두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그만둔다고 하니까 사표 낸 것이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10월초 한 인사가 기념사업회에 와서 브리핑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가 브리핑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한 유력 정치인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의구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제가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오시라고 했던 겁니다. 저를 돕는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특정 정치인이 관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숭모회라는 단체에 대해 아는 대로 들려주십시오.
“그 단체는 어린이회관 정문 앞에서 시위하던 날 처음 알게 됐습니다. 저를 나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최태민 고문을 나가라고 했다는데, 생각해 보세요. 제 부모님을 숭모하는 단체라면서 이런 곳에서 시위한다는 일 자체가 불미스러운 일 아니에요? 최고문은 이미 몇 개월 전에 완전히 손을 뗀 분입니다. 이미 물러나 있던 분에게 나가라고 하는 얘기는 무슨 의미죠? 이게 뭡니까?(이 대목에서 근혜씨의 목소리는 약간 높아졌다. 또 몸이 불편한 듯 몸을 자주 뒤로 젖히며 오른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만졌다.) 최고문이 기념사업회와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한다고 주장한다는데 제가 나이가 몇입니까? 사업회 운영은 제가 알아서 소신껏 해왔습니다.”
-최태민 전 기념사업회 고문에 대해선 말들이 구구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날 근혜씨는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최태민씨에 대해 언급했다.)
“지난 77년 저와 함께 새마음운동을 하던 최고문은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투서가 들어오니까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조사를 시켰습니다. 아버지는 내사 기록을 읽어보고 저를 배석시킨 가운데 친국을 한 뒤 없었던 일로 돌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최고문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조사를 받았는데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은 조사하지 말자던 아버지의 지시 등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최고문이 박회장에게 보낸 편지에 ‘꿈에 육여사가 나타났다’는 내용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몽이라거나 도사 혹은 ‘하얀 피가 흐른다’ 등은 유치한 말 아닙니까. 그분이야말로 현몽 등의 샤머니즘을 배격하는 분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따뜻한 위로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격려 편지를 읽어보고 만나게 된 케이스 중 하나입니다. 최고문에 대해 떠도는 항간의 루머를 믿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박회장은 최고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80년 직후 기념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유신 소리만 나와도 욕을 먹던 어려운 시기였는데 선뜻 도와준 사람이 최고문 뿐이었습니다. 참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항간의 구구한 억측에 최고문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들만이 떠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영씨는 최고문을 싫어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허무맹랑한 얘기입니다.”
-지난 추석 직후 김종필 최고위원의 자택을 방문해 금년부터 10․26 추모행사를 함께 하기로 합의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함께 추모행사를 하게 됩니까?
“제가 손을 떼니까 내년부터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박회장이 정치 활동의 뜻이 있다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주시죠. 앞으로는 또 무엇을 할 계획입니까?
“정치는 전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할 일이 없어서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건강을 회복해야겠지요.” “저희 이야기가 하나도 잡지 등에 실리지 않을 때가 가장 기쁘다”던 근혜씨는 “사회문제화된 이번 일이 조용하고 원만하게 잘 끝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당부의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