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영은 다작하는 배우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부터 <삼총사> <가면> <오 마이 비너스>까지, 총 4편의 작품을 연달아 했다. 최근 MBC <굿바이 미스터 블랙>을 마친 유인영은 그간의 노곤함을 지우기 위해, 더 큰 도약을 위해 재정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작품을 연달아 하느냐’고 물어요.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스스로 채찍질하는 거였어요. 도태하지 않기 위해서, 대중에게 저의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고 싶어서 멈추지 않았던 거예요.”
한 작품을 마치면 연기해온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호되게 아프다는 유인영에게 지금은 휴식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데뷔 12년 만에 처음으로 ‘나 홀로 여행’을 계획 했다는 그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여행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그곳에서 마주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음이 느껴졌다.
“이탈리아로 떠나요. 드라마 촬영 중에 충동적으로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죠. 연기를 시작한 후 첫 여행이에요. 그동안 잠깐씩 여행을 다녀온 적은 있지만 열흘이 넘는 장기간의 여행은 처음이라 설레요. 전날 짜놓은 스케줄에 변화가 생기면 혼란에 빠질 정도로 계획적인 성격이라 여행 기간에 뭘 할지 일정을 다 짜두었어요. 계획대로 여행을 마치고 올 거예요.(웃음)”
들뜬 모습이 마치 소풍을 앞둔 아이 같았다. 이토록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가 그동안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해졌다.
“표면적으로는 작품을 끊임없이 해서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여행 중에 작품 출연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여행 때문에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안 되잖아요. 한데 지금은, 한 번쯤 머리를 비우고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이번 여행은 어떤 이유로도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음… 새로운 작품에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면, 여행을 포기해야겠죠?(웃음)”
머리를 비울 때가 됐다는 말의 뜻이 궁금했다. 걱정거리라도 있는 건 아닐까.
“저는 걱정투성이에요.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것이 가장 큰 걱정이죠. 저의 이런 부분을 아는 선배님들은 시사회 뒤풀이나 모임에 오라고, 좋은 사람들을 소개해주겠다고 하시는데 죄송스럽게도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자꾸 거절하게 돼요. 최근에는 이런 성격을 고쳐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작품 출연에 너무 집착하는 게 아니냐”고 핀잔을 줬다. 유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고 했다.
“저를 보여드릴 수 있는 창구는 텔레비전과 스크린뿐이에요. 예능 울렁증이 있어서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은 꿈도 안 꿔봤고요. 또 제가 하고 싶은 캐릭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도 누구보다 저 자신이 잘 알고요. 작은 역할이라도 꾸준히 보여드려야 ‘유인영 연기 열심히 하네’라는 소소한 칭찬이라도 들을 수 있는 애매한 위치죠. 그래서 섭외 제안이 들어오면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녀 목소리엔 겸손이 묻어 있었다. 아직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 더 많기 때문에,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자신을 만나고 싶어서 유인영은 그동안 여유 대신 일을 선택했다.
“여전히 바쁜 스케줄이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서두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뭐든 급하게 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잖아요. 변화도 조금씩, 도전도 천천히 하려고 하죠. 저를 보는 팬분들이 불편하지 않게 말예요.”
실제로 그녀는 <별에서 온 그대>에서 인기에 목말라하는 악녀를 연기했는데 그다음 작품인 <가면>에선 사랑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녀를 맡았다. ‘못된 캐릭터’지만 분명히 온도가 달랐다. 변신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면서 생긴 변화였다.
“차갑고 도도하고 까칠한 이미지로 굳어지는 게 싫었어요. 착한 캐릭터, 부드러운 이미지의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트레스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막연히 내가 바라는 캐릭터를 기다리는 것보다 준비가 우선이고,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별에서 온 그대>와 <기황후> <가면> 속 캐릭터가 닮은 듯 다른 것처럼요.”
그녀가 거쳐온 캐릭터들은 악역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인물들이다. 사랑받지 못해 불쌍했고, 사랑해달라는 외침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악역 연기는 힘들어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도 소모적이죠. 늘 예민한 상태고 신경이 곤두서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눈뜨면 보는 대본에 욕과 나쁜 짓뿐이거든요. 저도 모르게 날카로워지는 거죠. 그래서 이젠 편안한 역할을 하고 싶어요. ‘쉬운 역할’이 아니라 저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는, 심적으로 밝은 캐릭터요. 그래서 예민하기보다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데뷔 12년 차. 유인영은 요즘 기술적으로 아는 게 너무 많아 오롯이 촬영 현장을 즐기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연기하던 데뷔 초가 자신을 더 풍부하게 해준 것 같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난 10년 동안 촬영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듣고 보고 배운 게 많아요. 대사 하나를 해도 카메라 앵글과 조명 각도까지 신경이 쓰이죠. 연기 외적인 것이 눈에 들어오면서 온전히 연기에만 집중하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연기가 어려워요. 예전에는 ‘연기는 할수록 어렵다’는 선배들의 말에 ‘하면 할수록 쉬워야지 왜 어려워?’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뜻을 알 것 같아요.”
유인영은 “또르르 흘리는 눈물 연기가 제일 어렵다”고 했다. “진짜 슬프면 눈물, 콧물 다 쏟아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되레 기자에게 반문했다. 여자 연기자로서 예뻐 보이는 연기를 해야 하는지, 못생겨 보여도 진정성 있는 연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란다.
“한 드라마를 보는데 여주인공이 너무 예쁘게 우는 거예요. 여자 연기자로서 예뻐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욕심이잖아요. 부러워하는 제게 어떤 선배님이 ‘상황에 맞춰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에 더욱 당황스러웠죠. 그런데 최근 그 고민을 해결했어요. 여자 연기자는 시상식이나 영화제 등 예뻐 보일 수 있는 무대가 많잖아요. 작품에서만큼은 진정성 있는 연기를 위해 예뻐 보이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예쁘게 나오는 동료 여배우들을 보면 부럽긴 해요.(웃음)”
‘고민 많은’ 유인영에게 ‘연애도 고민이냐’고 물었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환기됐다.
“그래도 연애는 잘해요.(웃음) 요즘에는 나이가 있어서인지 만나면 결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 조심스럽긴 해요.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면서 이따금 결혼하면 어떨지를 상상하곤 하는데, 결혼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해서 신중해지죠.”
유인영은 서른여섯 살을 기점으로 보고 있다. 지금은 일할 수 있음에 행복하고 감사하다며 웃어 보였다.
“서른여섯 살이 넘으면 일할 기회가 줄 것 같아요. 젊고, 예쁘고, 연기 잘하는 친구들이 계속 나타날 테고, 제가 언제까지 세련되고 도시적인 캐릭터를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연기적으로 한계가 올 때 결혼하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한 시간 남짓, 유인영과의 대화는 종잡을 수 없었다. 문득 그녀의 일상이 궁금했다.
“저 되게 ‘구식’이에요. SNS도 최근에 시작했을 정도로 바깥세상(?)을 잘 몰라요. 사생활을 드러내기 싫어서 SNS를 하지 않았지만, 신비주의 콘셉트는 아니에요. 대중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실제 제 삶의 갭이 커서 충격을 받으실 것만 같았죠. 제 일상은 평범 그 자체거든요. 화장도 잘 못할 정도로 바보 같은 부분도 있고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친한 사람들하고만 친해요. 갔던 곳만 가고, 먹던 음식만 먹죠. 사람들이 이런 제 모습을 알면 실망하지 않을까요? 방송에선 눈 부릅뜨고 나쁜 짓을 서슴없이 하는데 말예요.(웃음)”
이쯤에서 유인영의 SNS를 확인해봤다. 온통 셀카 사진뿐이다. 그 밖에 촬영 현장의 동료 배우들이 인스타그램 한편을 장식하고 있다. 그녀 말처럼 ‘별 게 없는’ 인스타그램이다. 부러운 장면 하나는 이진욱과의 투샷. 그리고 ‘좌진욱 우강우’ 컷.
“작품에서 만난 분들과는 친해지는데, 유난히 남자 배우 중심의 드라마를 많이 했기 때문에 남자 배우들과 더 친한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질투할까 봐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많이 올리지는 못하는데, 이진욱씨와의 친분은 워낙 유명하니까 그냥 올려요. 근데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이진욱씨 팬이라고 하네요.(웃음) 진욱 오빠에게 꼭 전해드릴게요! 여기 팬 한 명 추가라고요.”
‘이진욱 팬’임을 커밍아웃했으니 내친김에 이진욱과 연기 호흡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알콩달콩 멜로 신을 촬영할 때 너무 즐거웠어요. 서로 잘 알기 때문에 편했다고 할까요? 평소에도 자주 볼 정도로 친해서인지 키스신을 찍을 때 고생 좀 했어요. 로맨틱하게 촬영해야 하는데 얼굴만 봐도 너무 웃긴 거예요. 웃음 참느라 고생했어요. (김)강우 오빠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오빠가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됐거든요. 중심을 잡고 밀고 나가는 모습이 반할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유인영에게 연기가 왜 좋으냐고, 연기를 왜 하느냐고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수줍은 미소를 보인다.
“그 지점을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내성적이고 낯도 많이 가리는데 어떻게 이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아마 촬영 현장이 즐겁지 않았다면 못했을 거예요. 촬영 현장의 제 모습은 완전히 달라요.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하며 활달해지죠. 그만큼 현장은 제게 특별해요.”
유인영은 책임감을 느끼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를 얻고 싶어요. 스스로 ‘배우 유인영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부족한 걸 알기에 ‘배우’라는 수식어가 쑥쓰럽네요.”
그녀는 지금 이탈리아 여행 중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더 예뻐져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