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그날따라 비가 왔다. 할 수 없었다. 김원준과 우산을 쓴 채 경리단길을 걷기로 했다. 두어 시간 지났을까? 늦은 오후 비구름이 물러가자 날씨는 쾌청해졌다. 그와 마주 앉은 시간, 비 갠 오후만큼이나 분위기는 청량했다. “이태원에 종종 오기는 하지만 이렇게 구석구석 걸어본 건 처음이에요. 동네 분위기가 참 좋아요. 보물창고처럼 숨겨진 예쁜 곳도 많고요. 조만간 아내와 함께 와야겠어요.”
김원준의 깜짝 결혼 발표에 놀랐다. 아내가 14살이나 어리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그녀의 직업이 검사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런데 김원준이 상당한 ‘낭만주의자’임을 알고는 더 놀랐다. “저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요? ‘낭만’이죠. 이벤트를 해주기 때문에 낭만적이라는 것은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삶을 꿈꾸기 때문이죠. 개인으로서의 김원준은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데,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더없이 행복해요. 사랑하는 아내와의 일상…. 그것만으로도 낭만적이지 않나요?”
바쁜 스케줄 탓에 오랜 시간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반겨주는 아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김원준은 인터뷰 내내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신혼이니까 좋은 거겠죠? 저는 ‘지금’을 만끽할 거예요. 부부에게 신혼은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니까요. 2년쯤 지나면 남들처럼 저희도 싸우겠죠. 위기가 왔을 때 잘 극복하기 위해 먼저 결혼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요. 그리고 제겐 아내와의 로맨스를 이어갈 저만의 아이템이 있습니다. 바로 디지털 액자예요. 사진을 파일 형태로 넣어두면 플레이되는 액자인데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추억을 담아뒀어요. 초심을 잃지 않게 되더라고요. 프러포즈도 디지털 액자를 활용했고요. 부부에게 꼭 필요한 아이템인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띠동갑을 훌쩍 넘긴 나이 차의 여자를 결혼 상대로 확신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 연애기간도 짧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녀에게 반한 포인트가 뭐냐고. “어른한테 잘해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신 현충원을 찾아 산소 앞에서 편지를 낭독하는 아내의 모습에 반했어요. ‘놓치면 큰일 나겠다’ 싶었죠.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싶다고 했더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해 또 한 번 감동했어요.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내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아서 그런지 예의 바르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아요. 그런 모습이 예뻐 보였고,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았어요. 아내에게 반한 포인트는 이 두 가지입니다.(웃음)”
부끄러워서일까? 아내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면서도 결국 또 아내 이야기를 한다. 김원준은 비장한 표정으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더니 아내와의 에피소드 하나를 털어놓았다. “한번은 저희 집에 놀러 오겠다는 거예요. 그 말 한마디에 유난을 떨며 청소를 했죠. 한참 기다려도 오지 않길래 ‘왜 안 오느냐’고 전화했더니 뭐라는 줄 아세요? 이미 저희 집이라는 거예요. 제 방이 2층인데 1층에서 어머니와 수다를 떨고 있더라고요. 그때 어머니가 아내의 팬이 됐어요.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좋아하셨죠.(웃음) 장모님은 제가 밥을 아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내 딸을 굶기지는 않겠구나’ 싶으셨대요.(웃음)”
싹싹하고 착한 며느리와 든든한 사위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실망시킨 적이 없던 아내라 나이 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수 김원준에 대한 장모님의 선입견도 우직하고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겨낼 수 있었다. 김원준은 아내의 부모님을 두 번째 만나던 날 결혼 날짜를 잡았다. “제 러브 스토리… 재미있나요? 조금 쑥스럽네요.(웃음) 저에 대해 사람들의 선입견이 있잖아요. 장모님도 저에 대해 고정관념이 있으셨는데 식사 후 정리하는 제 모습을 보고 신기하셨대요. 그래서 말인데요, 저희 부부 앞으로도 행복할래요. 저는 낭만주의자니까요.”
아내가 인생의 절반이 되어버린 김원준. 나머지 절반은 음악이다. 평생 노래하며 살아온 그는 지금도 음악적 완성도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일렉트로 장르를 좋아하지만 저스틴 비버의 목소리에 심취하기도 한다. 댄스곡을 즐겨 부르지만 김수성을 자극하는 발라드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즉, 김원준은 음악을 편식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골고루 소화한다. “일렉트로 장르를 전공했어요. 전자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컴퓨터음악이 익숙한 사람이에요. 혼자서 하는 작업을 즐긴다는 말이죠. 근데 저는 ‘베일’이라는 밴드로도 활동해요. 여럿이 함께 작업하는 것도 좋아하죠. 특이한 케이스죠? 음악은 제게 삶 그 자체예요. 무엇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죠. 모든 장르를 다 들으려고 하고, 만들려고 해요.”
어릴 때, 그러니까 데뷔 초에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불리는 노래를 추구했다. 1집 수록곡 ‘모두 잠든 후에’가 대박을 터뜨렸고, 5집 수록곡 ‘쇼’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톱스타’ 반열에 올랐을 때 그는 ‘남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요. 스토리텔러, 즉 작가적 마인드가 생겼죠. 언제부터 이런 고민을 하게 됐는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5집이 성공한 뒤 스스로 제 음반을 제작하면서부터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만든 앨범이 실패해 슬럼프에 빠졌는데 결과적으론 그때의 위기가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음악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자 김원준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허리를 테이블에 바짝 당겨 앉고는 손짓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전에는 숲을 노래했다면 지금은 나무를 노래하고 싶어요. 사람들의 내면 그리고 제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을 노래에 담고 싶죠. 개개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부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요.”
20년이 넘는 기간을 남들 앞에 드러나는 삶을 살아온 김원준. 대한민국에서 김원준으로 산다는 건 어떨까? “심오한 질문이네요. 음…. 솔직히 말하면 아무 생각 없어요. 인기의 이면에 따르는 것들을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은 이미 오래전에 극복했죠. 그냥 음악이 좋아요. 음악은 되게 솔직하거든요. 주는 만큼 돌려주죠. 제가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 음악이 제게 주는 감동과 희열이 있어요. 순간의 기분을 음악으로 스케치하는 것, 그게 제 삶이 되어버렸죠.”
몰입할수록 기분 좋아지는 음악과 친구가 되었지만 좋은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가 끊임없이 해온 도전과 모험이 때로는 좌절과 후회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했던 가장 큰 후회는 제 음반을 스스로 제작한 거예요. ‘쇼’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는 늘 누군가와 협업했다면 그 이후에는 모든 걸 제 손으로 했죠. 제 이름을 내건 회사를 차렸어요. 결과적으로는 돈과 시간을 낭비한 게 됐죠. 그때 제가 왜 그걸 혼자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음악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었던 것 같아요. 후회하더라도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성격이 만든 결과예요.”
문득 궁금했다. 이토록 음악을 사랑하는데 지난 몇 년간 앨범을 발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음반을 만들지 않는다고 음악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저는 일상 속에서 늘, 지금도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악상이 떠오르면 즉각적으로 노래를 만들죠. 제 휴대폰에 있는 유일한 애플리케이션이 곡을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결혼 전에는 가끔 디제잉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안 해요. 대학 강의에 집중하기 위해서 디제잉을 포기했죠.”
이쯤에서 교수로 변신한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 김원준은 2005년, 우연한 기회에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기 위해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강동대학교 실용음악과의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왕복 2시간 거리를 매일 출퇴근한다.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학생들과 음악에 대한 것을 공유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학생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하루 중 가장 상쾌한 시간이다.
“친한 지인이 저를 침체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제안했어요. 처음 강의할 땐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없었죠. 아무 생각 없이 강의했다고 하는 게 맞을 거예요. 첫 강의는 홈레코딩에 대한 거였는데, 강의라는 것이 하면 할수록 매력이 있더라고요. 제가 학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보람되기도 했어요.”
방황하던 김원준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완전히 꺼진 줄 알았던 열정의 불씨가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되살아났고, 요즘은 제자들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낀다. “디제잉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가 학생들에게 전념하기 위해서였어요. 요즘 아이들요? 기량이 엄청나요. 감각도 좋고요. 최근 제자 한 명이 방송에 출연했어요. 자기만의 스타일로 노래를 불렀고 반응도 좋았어요.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더라고요. 요즘 제 낙 중 하나가 열정적인 학생들을 보는 거예요.”
김원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교육한다는 그는 학과장으로 부임하면서 교내 교수실을 없앴다. 방에 들어앉아 시간을 보내는 대신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삐거덕거리고 어려웠던 지난 시간들이 교육에 큰 도움이 됐어요. ‘안 된다’ ‘하지 마’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무엇이든 해보라’고 가르치죠. 다만 제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나는 이렇게 했더니 실패했어. 그러니 너는 저렇게 해봐’라고 조언해요. 자랑 같지만 제 강의를 신청하는 학생이 점점 늘었어요.(웃음)”
김원준과의 대화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아내와의 러브 스토리를 들려줄 땐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수줍어하다가도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꽤나 진지했다.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분위기를 이끄는 그는 사람 마음을 훔치는 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름다운 가정을 꾸렸고, 원하는 음악을 하고 있으며, 강단에서 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인 것 같아요.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아름답게 살래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김원준의 뒷모습마저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