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뒤마 소설의 모티브가 된 뽈리나의 사랑과 헌신
지난 호(<우먼센스> 4월호)에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명작 <전쟁과 평화>가 바이칼 호 인근 시베리아에서 30년간 유형을 산 귀족 혁명가들인 데카브리스트(12월 혁명당원)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톨스토이가 1856년, 새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수십 년 만에 귀환한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영감을 받아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해 먼저 <전쟁과 평화>를 완성했으나, 정작 데카브리스트에 관한 소설은 미완에 그쳤다는 것으로 지난번 글을 마쳤다.
비록 실패했지만 러시아 최초의 근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1825년 12월의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톨스토이뿐 아니라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등에게도 영향을 끼쳤으며,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에게도 영감을 주어 데카브리스트의 난의 와중에 피어난 눈물겨운 사랑의 이야기를 소설로 펴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뒤마가 쓴 소설의 제목은 <펜싱 마스터>. 이 소설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에 가담했다가 유형을 떠난 애인을 찾아 멀디먼 동토의 땅 시베리아로 가는 용감한 여인의 이야기를 테마로 하고 있다. 프랑스 여인 루이즈와 러시아 기병대 장교 알렉시스 바닌코프 백작이 주인공이다. 실제 인물은 처녀 시절의 이름이 자네타 뽈리나 게블인 프랑스 여인 프라스코비야 이고로브나 안넨코바(1800~1876)와 러시아 청년 장교 이반 안넨코프. 뽈리나 게블은 프랑스 로렌 지방 샹피니 성 출신으로 1823년 ‘듀만시’라는 회사의 여성용품 제조원으로 일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왔다, 아버지는 나폴레옹군의 장교였다. 뽈리나가 일하는 가게에는 안넨코프 백작 부인이 가끔 들렀는데 잘생긴 아들 이반 안넨코프가 같이 오곤 했다. 젊은 두 사람은 금세 눈이 맞았고 어느새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넨코프는 귀족이자 어머어마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였기 때문에 뽈리나는 그의 어머니가 결혼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넨코프는 그녀에게 비밀리에 결혼하자고 제안했다. 뽈리나는 이 제안을 거절했으나 두 사람의 연인 관계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825년 12월 14일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 날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다. 난은 당일 진압됐고 북부 결사의 일원이었던 이반 안넨코프는 닷새 뒤인 12월 19일 체포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감금되었다. 재판에서 처음에는 사형이 언도되었다가 20년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되었다. 1826년 12월 10일 안넨코프는 시베리아 치타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안넨코프가 체포되었을 때 뽈리나는 임신 중이었다. 첫딸을 출산한 후 뽈리나는 즉시 안넨코프를 따라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황제에게 탄원을 올렸다. 1827년 5월 뽈리나는 황제가 뱌지마라는 도시에서 진행될 군사훈련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 황제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녀는 군중을 헤치고 황제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어에도 서툰 외국 여성이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를 따라 시베리아로 가려고 하는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 황제는 뽈리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인이여, 여기는 당신의 나라가 아니지 않은가? 당신은 그곳에 가서 큰 불행을 맞을 수도 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러나 저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1840년에 나온 뒤마의 소설 <펜싱 마스터>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시점은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다.
소설 <펜싱 마스터> 속의 장면
…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진압된 다음 날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황비와 함께 근위병도 없이 암살 위험도 생각하지 않고 마차를 타고 광장을 돈다. 그때 황제에게 한 여인이 다가왔다. 황비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루이즈는 종이를 건넨다. 종이에는 ‘제발 알렉시스 바닌코프 백작을 살려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황제가 묻는다.
“그대는 백작의 여동생인가?”
그녀는 아니라는 뜻으로 슬프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 부인인가?”
또 한 번 머리를 흔든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인가?”
루이즈는 흐느끼며,
“저는 일곱 달 후면 그의 아이의 엄마가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는 루이즈에게 “불쌍한 여인”이라고 말하곤 궁으로 들어갔다.그후 반란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고, 처음에는 알렉시스를 포함한 36명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러나 5명에 대해서만 사형이 집행됐고 나머지는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되었다.
루이즈는 (평소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펜싱 사범) 그리시에르의 이름 있는 제자의 도움으로 다시 한 번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루이즈는 지난 첫 번째 청원은 알렉시스의 목숨을 위한 것이었고, 이번은 그녀 자신을 위한 청원이라며 알렉시스가 있는 시베리아로 가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한다. 황제는 “그곳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 줄 아느냐? 그곳은 연중 넉 달만 태양과 초록빛을 볼 수 있고 나머지 날들은 눈과 얼음뿐이며, 가는 도중에 잘 곳도 없는 지역이 많고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데 왜 굳이 가려고 하느냐?”며 여행을 만류한다.
루이즈는 “어떻게 해서든 가서 그의 아내가 되고, 그의 누이가 되고, 그의 천사가 되고, 그의 모든 것이 되겠다”며 허락을 애원한다.황제는 루이즈의 굳은 의지에 감동해 마침내 그녀의 시베리아행을 허락한다. 그리고 알렉시스를 시베리아 유형지까지 호송했던 하사관을 불러 그녀를 안전하게 시베리아까지 호위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루이즈가 알렉시스에게 가기 위해 가진 것들을 팔아 3만 루블을 모아놓았다가 사기꾼에게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3만 루블을 황후의 이름으로 그녀의 아파트로 보내주었다. 황제의 허락을 얻은 루이즈는 생후 얼마 지나지 않은 아들(소설 속에서는 아들로 나옴)을 알렉시스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서둘러 시베리아로 향한다. 모스크바를 거쳐 험난한 우랄산맥을 지나면서 눈사태, 늑대 등과 마주치며 마침내 시베리아에 도착한다. 알렉시스는 루이즈가 왔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하지만 곧바로 만날 수 없었다. 황제가 루이즈와 알렉시스는 부부로서만 만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사람은 정교회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뒤마, 소설 출간 18년 후 안넨코프 부부 만나
소설 속에서 니콜라이 1세는 꽤 인정 많은 군주로 묘사돼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펜싱 사범을 했던 그리시에르를 파리에서 만났다. 그리시에르에게서 러시아에서 겪은 여러 일들과 뽈리나와 안넨코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펜싱 마스터>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해 1840년 완성했다. 그리시에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때 같은 프랑스인인 뽈리나와 알고 지냈기에 그녀와 안넨코프 사이에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소설에서처럼 황제가 뽈리나에게 시베리아까지 호위병을 붙여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기록에는 소설과 달리 뽈리나가 딸을 낳았으며 딸을 안넨코프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시베리아로 갔을 때 이르쿠츠크 주지사 체이들레르는 앞서 트루베츠코이와 발콘스키의 부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뽈리나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1828년 4월 4일, 치타의 미하일 아르한겔스크 성당에서 뽈리나와 이반 안넨코프의 결혼식이 열렸다. 당국은 결혼식이 치러지는 동안에만 신랑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동료 데카브리스트였던 야쿠시킨은 “그녀가 없었더라면 안넨코프는 완전히 파멸했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1829년 5월 16일에 딸 안나가 태어났고, 1830년에는 올가가 태어났다. 이후 그들은 블라디미르, 이반, 니콜라이 등 아들 셋도 두었다. 믿기 어렵지만 뽈리나는 모두 18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단 여섯 아이만 살아남았다. 뽈리나는 생기가 넘치고 활동적이며 근면한 여인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안일에 전념해 직접 음식을 장만하고 텃밭을 일구었으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모두를 도왔다. 귀족 출신인 데카브리스트 아내들에게 요리와 집안일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녀의 새 친구들은 저녁마다 찾아왔고, 뽈리나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모두를 매료시켰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가볍고 편안했다. 그 이후 안넨코프 가족은 페트롭스키 자보드에서도 지냈고, 이르쿠츠크 주의 벨스코예 마을과 투린스크에도 있었다. 뽈리나는 남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갔다.
안넨코프는 1839년부터 군에 복무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으며, 1841년 안넨코프 가족은 토볼스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사면을 받은 1856년까지 거주하다가 이후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남은 20년을 행복하게 보냈다. 그들에겐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뒤마는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에서 추방돼 러시아에서 10년간 머무른 적이 있는데 그 시절인 1858년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안넨코프 부부를 방문했다. 뽈리나는 노년에 딸 올가에게 자신의 지난 인생을 구술했고 올가는 그 내용을 프랑스어로 써서 1888년 출간했다.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펜싱 마스터>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던 뽈리나 게블과 이반 안넨코프의 사랑 이야기는 모틸 감독에 의해 <황홀한 행복의 별>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작곡가 유리 샤포린은 <데카브리스트들>이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썼는데, 이 오페라 첫 편의 제목은 ‘뽈리나 게블’이다.
유형 가던 도스토옙스키가 받은 성경책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젊은 시절 시베리아에서 4년 동안 유형 생활을 했다. 체제를 비판하는 독서 모임에 가입한 죄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차르 체제를 비판한 문학평론가 벨린스키(1811~1848)의 편지를 낭독한 죄였는데 그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까지 끌려갔다. 그러나 형장에서 극적으로 감형이 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 12월 24일 밤, 정치범 두 명과 함께 뚜껑도 없는 마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영하 40℃까지 떨어지는 혹한 속에서 7일간 여행한 후 유형지인 옴스크에 못 미처 있는 토볼스크에 도착해 다른 동행 두 사람과 함께 엿새 동안 머물렀다.
이때 이곳에 살고 있던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방문했다. 부인들은 이 정치범들에게 음식과 옷가지를 주었고, 죄수들에게 유일하게 소유하도록 허용되는 성경책을 선물했다. 데카브리스트 폰비진의 아내 나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폰비지나(1803~1869)는 도스토옙스키에게 표지 속에 10루블짜리 지폐를 넣은 성경책을 전했다. 시베리아에 25년째 머무르고 있던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은 자신들의 남편과 같은 정치범인 이들을 만나러 가면서 성경책의 표지 사이에 지폐를 넣고 가장자리를 꿰맸다. 당시 유형지에서 10루블은 큰돈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성경책을 평생 간직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성경책을 준 폰비지나
도스토옙스키에게 성경책을 준 폰비지나는 신앙심이 강한 여자였다. 어릴 적 수녀원에 들어가려고 했을 정도였다. 도스토옙스키를 만났을 때도 신앙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 후에도 도스토옙스키와는 가끔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편지에는 신앙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녀가 유형을 간 남편을 찾아 시베리아로 떠날 때 두 살이었던 장남 드미트리는 1823~4년생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1821년생인 도스토옙스키는 폰비지나에겐 아들뻘이었다. 폰비지나는 유형을 가던 독서 모임의 리더 페트라셰프스키도 만났는데, 그로부터 아들 드미트리가 이들 그룹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미트리는 26세쯤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 것 같다.
폰비지나의 남편 폰비진은 퇴역 장군으로 북부 지역의 비밀 동맹원이었다. 그는 치타, 예니세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1838년부터 토볼스크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폰비진은 1827년 아내가 치타에 도착한 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의 동반자 나탈리야와의 슬프고 긴 이별의 시간을 보낸 끝에 오늘 나는 그녀를 보았고 내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 …하느님, 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폰비진은 아내보다 11살이 더 많았다. 부부는 시베리아에서 두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죽었다. 이후 부부는 두 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폰비지나는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유형 온 정치범들을 적극 도왔다. 그녀는 폰비진이 1854년 사망한 후 1857년 푸시킨의 죽마고우였던 푸쉰과 재혼했다. 2년 후 푸쉰이 사망하자 전남편 폰비진 옆에 묻고 모스크바로 이사해 살다가 1869년 세상을 떠났다.
절망의 순간에 시베리아에 나타난 애인 카밀라
프랑스인인 카밀라 페트로브나 이바셰바(1808~1839)는 나폴레옹을 피해 러시아로 온 공화주의자인 아버지와 가정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기병 장교이자 화가였던 이바셰프와 사랑에 빠졌으나 결혼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이바셰프가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에 연루된 죄로 체포되어 20년의 강제노동 유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나는 상황을 맞았다. 카밀라는 이바셰프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황제에게 따라갈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편지에서 그녀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이바셰프를 사랑했고, 그가 불행해진 순간부터 그의 삶이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꼈으며, 이바셰프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의지를 밝혔다. 오랜 청원 끝에 마침내 황제의 허락이 내려졌고, 그녀는 1831년 6월 시베리아로 떠났다. 트루베츠코이 부인 예카테리나가 1826년 6월 시베리아로 처음 떠난 것에 비하면 4년이나 늦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카밀라는 이바셰프의 아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지났으므로 시베리아 유형지로 오는 자신을 이바셰프가 어떻게 생각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아내 잃은 1년 후 아내 곁으로 간 남편
이바셰프는 오랜 유형수 생활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카밀라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내 시베리아에 도착한 카밀라는 발콘스키 부인의 집에 머물다가 일주일 뒤에 이바셰프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결혼 한 달 후부터 정치범 독감방에서 함께 살았다. 카밀라는 명랑하고 친절한 성격이어서 사람들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았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마리야, 베라, 표트르 등 세 자녀를 두었다. 1839년 초, 카밀라의 어머니가 그들이 살고 있는 투린스크로 와서 아이들을 키워주며 함께 살았는데, 그해 12월 카밀라가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조산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31세였다. 이바셰프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바셰프는 한 편지에 카밀라가 세상을 떠나던 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의 슬픈 이별을 앞두고 있던 밤, 병세가 힘을 잃기라도 한 듯 카밀라의 얼굴은 생기를 되찾아 공경하는 마음으로 종교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는 두 번이나 아이들을 축복했고, 슬퍼하는 주위 친구들과도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집안 하인들에게도 일일이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나와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우리는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그녀는 우리들의 손을 하나로 모아 각각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나중엔 모든 사람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카밀라는 우리들과 차례차례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았다. 나는 카밀라의 손을 내 뺨에 갖다 대고, 내 손의 온기로 그녀를 따뜻하게 해주었다. 카밀라는 그런 자세를 더 오랫동안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눈을 반쯤 뜬 채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바질.”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다. 너무나도 가엾고 너무나도 불행하다. 내겐 더 이상 동반자가 없다. 그녀는 가장 힘든 시간에 우리 부모님의 위안이 되어주었고, 지난 8년 동안 나에게 행복, 헌신, 사랑, 그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랬던 나의 연인이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이바셰프는 카밀라가 죽은 지 꼭 1년 뒤 돌연 세상을 떠났다. 자살했다는 얘기도 있다. 카밀라 1주기 때 이바셰프의 장례식이 치러져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시베리아 이야기 다음 호는 ‘춘원 이광수 소설 <유정>의 무대 바이칼’로 꾸며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