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후예>는 김은숙 작가 얘기를 빼놓고 갈 수 없다. 그녀가 손대는 작품 어느 하나 성공하지 않은 게 없지만 <태양의 후예>는, 단언컨대 최고의 대중적 성공을 거둘 것으로 점쳐지기 때문이다. 송중기가 만들어내는 그토록 멋진 캐틱터는 김은숙 작가의 찰진 대사에 상당부분 빚졌다. 김은숙 작가의 창작 원천이 되는 실제의 그녀 러브 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사는 2011년 <시크릿 가든> 종영 후 가졌던 인터뷰 기사를 토대로 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편집자 주)
김은숙 작가는 그 흔한 ‘보조작가’ 경력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낙 하산’도 아니다. 드라마 작가 경력만 없을 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를 졸업하고 끊임없이 글을 쓰고 있었다. 소설가 신경숙 을 동경해 그이처럼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신춘문예에는 번번이 낙방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던 찰나, 드라마 작가 제의를 받 았다. 그녀에게도 힘든 시절은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삼형제만 남은 뒤로는 줄곧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돈이 없어 어릴 때는 변변한 책 한 권 사 읽지 못했고, 초등학교 때는 가난한 일상에 대해 말 하 는 것이 싫어 일기장에 일기 대신 동시를 쓰기도 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어린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녀가 쓴 동시를 칭찬해줬고, 그때처음으로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졸업 뒤에는 돈을 벌기 위해 바로 일반 회사에 입사했다. 그 시절에는 어릴 때 읽지 못했던 책을 탐독했다. <토지> <아리랑> <태백산맥>을 비롯해 오정희와 신경숙 작가의 책은 모두 섭렵했다. 그러다 신경숙 작가처럼 소설가가 되고 싶어 1997년 스물다섯에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 ‘늦깎이’ 입학했다. 대학 시절은 등록금 내기도 빠듯했지만 그동안 살아왔던 인생 중에 가장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로는 줄 곧 월세 30만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았다. 새우깡 한 봉지로 3일을 버틴 적도 있고, 다시 고향으로 갈까 숱한 밤을 고민했다. 그 생활은 드라마 작가가 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제의를 받았을 때는 작가고 뭐고 월급 70만원이라는 말만 귀에 들어왔다. 그렇게 시작한 작품이 2003년, 강은정 작가와 함께 집필한 <태양의 남쪽>이었다.
월세 30만원 단칸방 생활에서 하루아침에 스타 작가로 발돋움한 작가의 드라마틱한 인생이 화제가 됐는데요?
이 부분을 물어보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나….(웃음) 인생의 굴곡, 있었죠. 그런데 이런 얘기를 구구절절 하고 싶지는 않아요. 단순히 없이 산 얘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것과 결부되는 느낌이에요. 그냥 그런 것이 자꾸 작품과 연결되다 보면 프로답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어 ‘라임이’는 그냥 월세 30만원짜리 집에 사는 여자인데, 그걸 가지고 “작가가 자기 옛날 시절을 떠올리며 썼다”고 하면 마치 제 머릿속의 로망을 드라마로 푸 는 작가 같잖아요. 그리고 사실, 제가 주원이처럼 까칠한 남자를 만나 봤겠어요, 아니면 라임이처럼 멋지게 대처를 해봤겠어요. 사람 사는 거 다 실제로는 ‘찌질’하죠.(웃음) 그러니까 드라마에서는 선남선녀의 멋진 ‘밀당(밀고 당기기)’이 보고 싶은 거고요. “내 연애 얘기 정말 재밌어요, 드라마로 만들어볼까요?” 하면 “니 돈으로 만들어!” 바로 이런 대답 나오는 것이 이 바닥이에요.
그럼 드라마 속 설정이나 에피소드에 경험한 것은 얼마나 쓰나요?
<시크릿 가든>에서 주원이가 라임이 미간 을 누르면서 “네 꿈속은 뭐가 그리 험한 건데?” 이렇게 말하는 건 우리 부부사이에 있었던 이야기가 맞지만, 대부 분 은 철저히 상상 해서 만든 에피소드예요. 상상한다고 어느 날 갑자기 에피소드가 확 떠오르는 게 아니거든요. ‘이쯤에서 얘네가 조금 달달해지면 좋겠다. 어떤 신이 좋을까? 라임이가 스턴트우먼이니까 주원이가 따라다니면서 같이 운동을 하는 장면을 넣을까?’ ‘PT체조는 너무 딱딱하고, 줄넘기는 각자 하는거고, 그래 윗몸일으키기가 좋겠다.’ 이렇게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생각을 해나가는 거예요. 모든 에피소드가 경험한 것이거나 갑자기 떠올라서 쓰면 제가 천재이게요!(웃음)
그럼 본인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언제였나요?
첫 작품 <태양의 남쪽> 기획안이 오전에 방송국에 들어가서 오후에 편성 확정 전화를 받았을 때.(웃음) 그 순간은 지금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글을 쓰면서 먹고 살고 싶던 한 지망생에게 누군가 기획안 을 써보라고 제안했어요. ‘기획안이라는게 있어?’ 하던 애들 둘(김은숙·강은정 작가)이서 일주일 동안 끙끙거리며 쓴 것이 A4용지로 80페이지나 됐죠. 그게 방송국에 들어가서, 편성이란 것을 받고, 우리가 쓰는 것이 드라마로 나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던, 정말 제 인생에 가장 드라마틱하고 기적 같은 순간이었죠. 지금도 그 순간 을 잊을 수가 없어요.
두 번째 작품 <파리의 연인>이 시청률 50%를 기록한 순간을 꼽을 줄 알았는데요?
그건 그냥 날아갈 것 같은 순간!(웃음) 드라마 를 쓸 때 평가에 대한 걱정은 해도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어요. 특히 경험이 쌓이면 그 예상은 더 확실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파리의 연인>은 정말 예상 밖의,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게 맞아요. 드라마 작법도 모르고, 얼떨결에 드라마 한 편 써본 경력이 전부인 작가가 누리기에는 과 분하고 얼떨떨했죠.
그리고 그 드라마가 끝난 뒤 바로 지금의 남편도 만난 거죠?
<파리의 연인>을 끝내고 필리핀에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어요. 사실 이런 얘기를 자꾸 하는 것도 쑥스러워요.(웃음) 자꾸 제가 들이댔다고 하도 기사가 많이 나와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끝낸 뒤 김은숙 작가는 휴식 차 홀로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곳에서 지금의 남편 최상현(36세)씨를 만났다. 남편은 현지에서 바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곳에 우연히 들른 김은숙 작가는 첫눈에 남편에게 호감을 느꼈다. 실제로 인터뷰 날만난 최씨는 한 눈에 보기에도 잘 생긴 외모에 듬직한 체격까지 자랑하는 ‘호감형’ 미남이었다. 김은숙 작가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했고, 처음에는 그녀가 드라마를 쓴 다는 말에 선입견을갖고 있던 남편도 그녀의 ‘의외의 매력’을 발견하고 짧지만 뜨거운 연애를 했다. 이들은 1년여의 만남 끝에 결혼에 골인했고, 2006년 딸 민지도 얻었다.
한사코 사진 촬영은 거절해 아쉽게도 부부의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아내를 찾아온 손님에게 살뜰하게 식사 대접을 하는 것을 보니 왠지 ‘외조의 왕자’ 냄새가 폴폴 풍긴다. 하지만 그는 “아휴, 저 외조 그런 거 몰라요” 하며 손사래부터 친다. 그는 아내의 작품을 꼬박꼬박 챙겨 보며, 엄마 몫까지 딸 민지를 돌보는 것으로 외조를 대신한다. 가끔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저 드라마를 쓴 사람이 내 아내라고?’ 이런 생각도 든단다.
그만큼 아내가 ‘스타 작가’라는 사실을 여전히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크릿 가든> 마지막회 방송을 앞두고 한창 ‘엔딩 논란’이 일었을 때는 문자로 아내에게 “해피엔딩 아니면 이혼할 줄 알아!”라고 귀여운 협박(?) 문자를 보낸 열혈 시청자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랬다”며 머쓱해하는 최씨가 드라마 마니아가 된 것은 순전히 김은숙 작가 때문이다.
남편이 원래 드라마 쓴 거 다 꼼꼼히 모니터링해주는 스타일인가요?
제가 쓴 드라마니까 보긴 봐요. 하지만 <시크릿 가든> 이전에는 아마 거의 억지로 봤을걸요? 유일하게 보는 TV 드라마도 제 작품밖에 없고요. 그런데 이번 <시크릿 가든>은 정말 재미있어 하더라고요. 남편의 취향을 이제 알았어요.
처음 만날 때 ‘스타 작가’라는 것을 알고 만났는지. ‘어필’하는 데 도움 좀됐을 것 같은데요?
전혀 아니에요.(웃음) 그때 남편은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한국에서 드라마 하나가 인기가 있다더라, 이 정도로만 알고 있었대요. 당연히 그 드라마를 쓴 작가가 나인 줄도 몰랐고요. 처음에 제가 호감을 보인 건 맞아요. ‘나 엄청 유명한 작가다’라고 말하고 싶어도 남편이 뭘 알아야 말을 하죠.(웃음) 뭐, 알았더라도 그 말은 안 했겠지만. 게다가 남편은 전형적으로 스포츠, 레포츠를 좋아하는 남자였어요. 뭐랄까, 남자들 특유의, 드라마 보는 여자들을 살짝 폄하하는 부류?
꼬이기 쉽지 않았겠네요. 어떻게 했나요?
하하. 처음엔 뭐, 어디 쉬운 일이 있나요. 하하. 여자들이 드라마 보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알고 보니 이 여자가 드라마를 써서 여자들을 선동(?)하는 사람이라니, ‘오 마이 갓!’이었던 거죠. 그런데 남자들이 진짜 여우예요. 둔한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여자들보다 더 눈치가 빨라요. 자기한테 관심 있는 거 다 알아요. 그냥 모르는 척하는 거지. 그래서 여자는 자기 좋다는 남자 만나야 돼요. 안 그럼 우습게 안다니까?(웃음) 그렇다고 뭐 남편이 저를 우습게 여긴 건 아니고요,
결국 그의 마음을 얻었는데, 어떤 점에 끌렸을까요?
아무래도 드라마를 쓰다 보니 다른 여자보다 말을 잘했겠죠!(웃음) 매일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약간 똑똑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을 테고,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현명한 판단을 하는 듯 보인 것이 턱없는 외모에 비해 좋게 작용한 것 같아요. 그 뒤로는 뭐 사람 만나는 게 다 똑같죠. 단지 서로 긴장하는 것이 조금 오래간 것 같아요. 부부가 된 다 음에도 서로에 대해 완전히 다 오픈하지는 않아요. 그냥 너무 풀어진 모습은 안 보여주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저는 조금 불리해요. 작업할 때 가끔 남편이 작업실에 오면 그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 씻지도 않고 앉아 있는 제 모습 을 그대로 보이는 거잖아요.
제가 원고 쓸 때는 특정 브랜드의 아이스커피와 초콜릿을 항상 쌓아두고 먹거든요. 막 다리도 떨고 그래요. 그래도 그것만 보는 게 다행이다 싶어요, 하하. 그래도 아직까지는 서로 살짝 설레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부부생활은 <시크릿 가든>에 나온 것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단지 저는 아이가 한 명뿐이라는 거.(웃음) 민지가 뱃속에 있을 때 드라마 <연인>(2006년)을 썼어요. 첫방 한 달 전에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민지는 태교를 조폭 드라마 쓰면서 했어요.(웃음) 몸조리도 하지 못해서 진짜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저는 더 이상 둘째 계획은 없는데, 민지랑 남편이 성화죠. 민지는 동생 낳아달라 하고, 남편은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작업실에 있으면 아이를 많이 못 챙겨줄 텐데요?
아이한테 가장 미안한 일이죠. 민지가 엄마 일하는 걸 뱃속에서부터 느껴서인지 많이 참아줘요. 같이 생활하면서 작업하는 것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떼어놓고 일을 하고 있는데, 드라마 쓸 때 저의 가장 큰 적은 타 방송사에서 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최민지’예요. 일하다가도 한번 통화하면 전화 끊고 30분이고 1시간이고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야 글을 쓸 수 있어요. 그냥 짠한 마음이 들어서…. 울기도 엄청 울고요.(웃음) 그러다 중간에 남편이 데리고 한 번씩 와요. 잠깐 같이 시간 보내다가 제가 먼저 말 하죠. “엄마 일해야 돼.” 그럼 민지가 “알았어. 엄마 힘내세요” 하고 현관까지 잘 나가요. 그러다가 아빠 차 타고 우는 거예요. “엄마 때문에 눈물 나잖아” 하면서 참던 울음을 터뜨리는 거죠. (이 얘기를 하며 김은숙 작가는 눈물을 글썽였다.)
제천이라는 거리도 애틋함을 더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이나 일산 작업실 옆에서 지내는 건 어떨까요?
일단 서울은 제가 싫어요. 사람 만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고,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잡아도 어떻게 하면 약속을 깰 수 있을까 하고 만나는 날까지 고민해요. 그런데 서울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이어져야 하는 인간관계라 는 것이 있잖아요. 일과 관계된 만남도 있고, 제가 보고 싶은 사람, 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때 “나 제천이야”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 돼요.(웃음) 또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특별히 관심이 없는 이곳 사람들 특유의 감성도 좋아요. 여기는 배우에 관심 있지 드라마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현빈 어때요?” 물으면, “좋아요” 하면 되거든요. 편해요.
엄마라면 으레 아이들 교육 걱정을 하게 마련인데요?
저희 집이 대가족이에요. 제천 시댁에 3대가 모여 살아요. 일단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작업하는 동안 마음 놓고 민지를 맡길 수 있는 장점이 있고요.(웃음) 서울에서는 민지에게 줄 수 없는 산, 들, 개구리가 있어요. 철따라 꽃도 피고요. 아버님이 산림조합장을 하셔서 집 주위가 온통 나무예요. 나무 이름, 꽃 이름은 아마 저보다 민지가 더 많이 알걸요. 집에서 먹는 것은 직접 농사를 지어 먹는데 아버님이 꼭 민지를 데리고 다니세요.
가족들이 다 같이 나갈 때도 있고요. 고추 따고, 고구마 캐고, 배추 씨앗 뿌리고, 도라지밭 매고... 돈으로는 도저히 해줄 수 없는 것들이죠. 저만 잘하면 돼요. 하하. 제가 현실적이지 못해서 아까도 민지 유치원에 상담을 하러 갔는데, 선생님한테 물어볼 말이 없는 거예요. 요즘은 유치원에 미술 선생님, 사고력 선생님, 담임선생님 다 따로 있는 거 아세요? 각 선생님마다 분야에 맞게 아이의 성향을 물어보고 해야 되는데, 막상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만나는 선생님들마다 “왕따는 아니죠?” 이런 거 물어보다가 왔다니까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니까 선생님들이 살짝 당황하신 것 같아요.
그녀는 요즘 이런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있다. ‘민지에게 야채를 어떻게 먹일까’ 하고 고민하는 일이 대사를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그녀. 예전에는 일을 안 하면 마치 ‘금단증상’처럼 작업실이 생각나곤 했는데, 이제는 당분간 작업실 출입은 ‘끊을’ 생각이다. 어려서 민지와 너무 많이 떨어져 지내서인지 ‘아이가 조숙하다’는 말이 마 음에 상처로 남았다. 그래서 민지에게도 “우리 지겨워질 때까지 같이 놀자!” 하고 약 속했다. “또 손이 근질근질해지면 슬금슬금 기어 나올지도 몰라요. 도박꾼 들이 손이 잘려도 발로 도박한다 잖아요. 그래서 당분간 손, 발을 민지랑 남편에게 다 묶어두려고요 .” (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