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이 없어. 역시 모델이야.” 포토그래퍼가 말한 대로였다. 처음 만나 기자와 인사를 할 때도, 알아보고 인사하는 팬들에게 화답할 때도, 최근 출판한 자신의 책에 사인을 할 때도,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진중하게 고민할 때도, 그녀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야노 시호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비단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날씬하고 비율 좋은 몸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특별한 뭔가가 그녀에게 있었다. 휑한 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녀를 간단하게 카메라로 찍었을 뿐인데, 한 컷 한 컷이 화보 그 자체다.
“우아, 어쩜 저렇게 얼굴이 작을까? 중절모 같은 모자도 시호가 쓰니까 패션이야. 사람이 아주 반짝반짝 빛나네.” 지나가던 중년 여성들은 그녀를 향해 질투는커녕 순수한 찬사를 보냈다. 10대 소녀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시호다, 시호. 너무 예뻐, 어떡해~”를 연발했고, 한 노부부는 부산에서 그녀를 보러 올라왔다고 고백했다. 지나가던 나이 지긋한 여성은, “한국에서 살면 좋겠다”며 부동산을 알아봐주겠다고 농담 섞인 제안을 던지기도 했다. 그녀가 이토록 폭넓은 사랑을 받는 이유가 단지 ‘국민 베이비’ 사랑이의 엄마이기 때문일까?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사인회에서도 팬 한 명 한 명에게 환한 미소를 건네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야노 시호.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셀카’까지 기꺼이 찍어준 것은 물론이다. 이런 그녀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해요. 많은 분들이 저더러 인생에 한 번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 같다고들 하시는데, 저 역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연당하고 자책하며 괴로워했던 ‘흑역사’가 있어요. 여자 분들이라면 공감하실 거예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의 심정 말이에요.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내가 왜 그랬을까’ 계속 회상하며 괴로워하던 나날 끝에 결심했죠. 그 모든 미련을 끊고 긍정적인 생각만 하며 달리기로요. 이후 지금까지 그 결심을 꽤 잘 지켜온 것 같아요.” 사랑의 아픔을 딛고 달리던 그녀는 운명을 만났다. 링 위에서는 거친 파이터지만 가정에서는 더없이 속 깊고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인 추성훈. 남편에 대해 질문하자 부끄러워하면서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는 그녀에게서 행복한 부부생활이 느껴졌다.
“사실은 남편을 처음 만나고 결혼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책에 많이 적었다가, 부끄러워져서 뺐어요.(웃음)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요. ‘단점이 없다’는 게 첫 느낌이었어요. 조금 친해지니까 보이긴 하더라고요. 술 취했을 때 말버릇이 좀 안 좋았어요.(웃음) 그렇지만 단점에 대해 진지하게 충고하면 수긍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 좋아졌지요.” 그렇게 2년을 연애한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이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생긴 다음엔 제가 ‘오라’를 뿜었어요. ‘결혼해줄 테니, 어서 청혼을 하란 말이야’라고요.(웃음) 또 주변 친구들도 저를 도와 옆에서 분위기를 잡아줬어요. ‘시호의 생일이 가까워 오니, 프러포즈를 할 거지?’라고요. 2년이 된 어느 날 ‘1년 더 연인으로 지낼까?’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차피 계속 연인으로 지낼 거라면 결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결론에 도달했죠. 그렇게 성훈씨에게 청혼을 받았답니다.(웃음)” 결혼생활 2년 반 만에 그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사랑이를 얻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이가 태어났을 때”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깊은 모정이 느껴졌다. “막 태어난 사랑이를 안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아이를 두고 나는 이제 죽을 수 없겠다’고요.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기는구나, 사랑이가 바로 내가 태어난 이유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아이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모든 순간이 제겐 선물 같아요.”
이토록 소중한 딸이라 처음엔 TV 프로그램에 내보내기 꺼려졌던 게 사실이다. 만일 한국에 살았다면 사랑이를 출연시키지 않았을 거라고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행히 걱정과 달리 많은 분들이 사랑이와 저희 가족에게 큰 애정을 보내주셨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사랑이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이 많아요. 가끔 사랑이가 아버지를 따라 파이터의 길로 가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어요. 솔직히 옆에서 지켜봤을 때 가능성이 적지 않아요. 체력도 운동신경도 뛰어난 편이에요. 소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어느 길을 선택하든 사랑이를 응원할 거예요.” 딸 이야기만 나오면 재잘재잘 수다쟁이로 변하는 야노 시호. 그러나 여자로, 엄마로, 아내로, 모델로 바쁜 삶을 꾸려나가는 그녀에게 육아가 늘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성장하는 사랑이를 감당할 수 있는 엄마로 발전하기 위해 그녀는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작은 소동이 있었어요. 사랑이가 장난으로 던진 물병에 매니저가 맞은 거예요. 저는 너무나 깜짝 놀라 사랑이 팔을 찰싹 때리며 ‘그러면 안 돼!’라고 외쳤고요.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사랑이에게 ‘왜 물병을 던졌니?’라고 물었지만, 엄마에게 혼난 것에 충격을 받은 사랑이는 입을 열지 않았어요. 난감한 상황에 당황했지만, 아이에게 사과했어요. ‘엄마가 당황하고 놀라서 그만 너를 때렸구나. 정말 미안하다.’ 사과를 받은 이후에야 대화를 할 수 있었죠.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건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으로 판단하기 전에 먼저 아이에게 이유를 묻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거예요. 사랑이를 키우면서 저도 엄마로서 발전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셈이에요.”
자신이 맡은 인생의 역할 중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야노 시호는 웃었다. 모델로서 완벽한 몸매와 마인드를 유지하기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요가 자세를 취하는 동시에, 주부로서 가족들의 식사를 되도록 직접 준비하려고 노력한다.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면서 늘 바쁜 그녀가 어쩌면 저렇게 요리도 잘할까 감탄한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화면으로 보니까 요리를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나 봐요. 저는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러 다녀요. 미각이 발달해야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죠.(웃음) 정말 맛있는 음식점이다 싶으면 요리법을 늘 물어보지요. 또 다양한 요리책을 보는 것을 좋아해요. 복잡한 요리법은 귀찮아서 간단한 요리 시리즈를 주로 찾아 보지요. 저는 식품첨가물이나 방부제 등이 많이 사용된 음식은 거의 먹지 않아요. 컵라면이나 즉석 식품도 구입하지 않으려 하고요. 유기농이나 채식 매장을 즐겨 찾는답니다. 전자레인지도 잘 사용하지 않아요. 냉동식품은 상온에서 자연스럽게 녹이고 음식을 데울 때에는 프라이팬에서 다시 굽지요.”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으러 다닌다는데 그녀의 몸매는 어쩌면 이토록 날씬한 걸까?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늘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 아닐까? “제 나름의 식사 리듬이랄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신선한 물을 한 컵 가득 마셔요. 그리고 신선한 채소와 제철 과일을 먹지요. 그 상태 그대로 먹기도 하고 스무디를 만들어 먹기도 해요. 요거트도 곁들이고요. 대신 점심은 먹고 싶은 음식을 양껏 먹어요. 낮에는 몸을 많이 움직이니까 그 정도는 괜찮거든요. 30대 후반으로 넘어오면 기초대사량이 줄어들면서 군살이 생기기 쉬워요. 그래서 저도 좋아하는 초콜릿 같은 음식을 과하게 먹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어요. 고기 대신 생선 위주로 식사하는 것도 변화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녀가 이토록 모든 역할을 충실하게 해낼 수 있는 이유는 ‘백점짜리 아빠’인 추성훈이 늘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방송에서 장난스럽게 “아빠로서는 더할 나위 없지만 남편으로서는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던 야노 시호. 때로 남편에게 서운한 것은 없는지 슬며시 물었다. “옛날엔 조금 힘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젠 괜찮아요. 사소한 문제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요. 결혼 초기, 저는 이상적인 모습과 우리의 현실을 비교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게 어리석은 일이란 걸 알게 됐어요. 우리는 둘 다 자유로운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서로를 존중하면서 사랑하자고 결론을 내렸죠. 제가 만들어놓은 이미지 안에 상대편을 가두지 않기로 한 것이죠. 저는 ‘사랑은 자유’라고 생각해요. 나를 나답게 하고, 그를 그답게 하는 게 바로 자유 아닐까요? 그렇게 마인드를 바꾼 이후로 부부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어요. 물론, 과거나 지금이나 아빠로서는 변함없이 훌륭하고요.”
한국에는 추성훈의 아내, 사랑이의 엄마로 더 알려졌지만, 그녀는 일본의 톱모델이다. 정상의 자리를 오래도록 지키기까지 그녀의 노력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큰 고민 하지 않고 엄마의 권유에 따라 모델 일을 시작했죠. 10대를 지나며 고민하던 때에 저의 뮤즈를 만나게 되었어요. 바로 모델 케이트 모스죠. 1990년대 초반에 출간된
“자세와 포즈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만이 자아낼 수 있는 분위기라는 게 있다고 믿어요. 저는 촬영 현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한 다음에는 가장 잘 어울리는 멋진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봐요.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모델이 해야 할 일이지요. 순발력과 상상력이 매우 중요해요. 또 몸으로 표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늘 마르지 않는 영감이 필요해요. 그래서 패션 화보뿐 아니라 영화, 음악, 다양한 예술 작품을 즐겨 보지요.” 모델 일을 선택하고 지금까지 걸어온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야노 시호. 일본을 넘어 아시아 전체에서 사랑받는 모델이 되는 것이 자신의 숙제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단단한 열정이 느껴졌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 뒤에는 프로페셔널한 모델 시호가 숨어 있었다. “아내로, 엄마로, 모델로 사는 삶이 결코 녹록지는 않지만, 시너지 효과가 난다고 믿어요. 만일 집에만 있었다면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여자라면 누구나 엄마의 이름을 잠시 내려두고 나 자신으로 사는 순간을 꿈꾸죠. 제겐 그것이 바로 모델 일이에요. 만일 지금 엄마라는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힘든 분이 있다면,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아이와 거리를 두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는 시간을 꼭 가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삶에서 밸런스를 맞추는 건 정말 중요해요. 누군가의 엄마와 아내로 잘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으로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해요.” 이날 그녀를 찾아온 팬들 중에는 젊은 여성이 많았다. “야노 시호는 겉모습도 아름답지만,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이 정말 멋있어요. 꼭 닮고 싶어요”라고 서점을 찾은 한 팬은 말했다. 일본에서도 일과 가정 모두 야무지게 해나가고 있는 ‘카리스마 시호’를 보며 동경하는 젊은 여성이 많다는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야노 시호 또한 자신을 사랑해주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자기 자신을 믿으세요.(한국말로) 이 부분은 꼭 한국말로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저 역시 20대에는 마냥 즐겁게 일하다가도 문득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맞이했죠. 그럴 때마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원동력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더라도 절대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길 바라요. 다가올 30~40대를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하시길 바라요.”
야노 시호는 팬들과 이야기하는 내내 멀리 서 있는 팬에게도 아이처럼 손을 흔들어 보였고, 한 팬이 내민 책에 사인을 하다가 잘못 쓴 오타 위에 하트를 덧그리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기도 했다.한국에 머무르는 모든 시간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시호는 곧 일본으로 돌아간다. 앞으로의 그녀의 계획을 물었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올 때마다 한국분들이 너무 반갑게 맞아주셔서 일본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며 지낼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에요. 혹시 빌릴 만한 좋은 집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려요. 그리고 한 가지 목표가 더 있죠. 언제나 바라왔던 꿈인데, 바로 마흔두 살이 되기 전에 사랑이 동생을 갖는 거예요. 이미 성훈씨도 합의한 내용이라니까요.(웃음) 응원해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