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빈을 만난 건 영화 <스물>이 개봉한 지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스물>은 혈기 왕성한 세 친구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작품으로 3백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닌데 그날도 역시 큰 키에 다부진 몸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도 모델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김우빈을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스물다섯 살을 살고 있는 이 청년은 솔직담백했으며,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배꼽을 잡고 깔깔대다가도 ‘연기’라는 단어만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해진다. 마치 섹스에 열광하고 사랑에 우는 <스물> 속 ‘치호’처럼 말이다.
2008년 패션 모델로 데뷔한 김우빈은 KBS2 드라마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연기를 시작했다. 이후 단막극 <큐피드 팩토리>와 드라마 <뱀파이어 아이돌> <신사의 품격> <학교 2013>으로 연기 내공을 쌓았고 지난해 SBS 드라마 <상속자들>을 통해 ‘스타’라는 이름표를 얻었다. 이미 중국에서는 이민호, 김수현, 이종석과 함께 ‘신(新) 4대 천왕’으로 불리며 인기몰이 중이다.
“데뷔 후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했어요. 그런데 만족스러운 작품은 하나도 없어요. 항상 아쉬움이 남죠. ‘저 장면에서는 왜 대사를 저렇게 했지?’라는 자책감이 들 때도 있었어요.”김우빈은 <스물>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연기했다. 19금 대사를 경쾌하게 날리는 코믹 연기로 관객들의 배꼽을 훔쳤다. 그동안 보았던 무게 있는 모습과는 또 다르다.모델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지 올해로 4년 차. 연기를 ‘잘’하고 싶은 갈증이 있었다. “함께 작품을 했던 선배님들께 자신의 작품을 편히 보는지 물은 적이 있어요. 오래 연기하신 분들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마음가짐이 연기자로서 오랜 생명을 유지하는 비결인 것 같아요.”
김우빈은 <스물>을 통해 소중한 친구 두 명을 얻었다. 이준호와 강하늘. 석 달 동안 함께 울고 웃었던 세 사람은 그렇게 ‘친구’가 됐다. “<스물>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선물은 하늘과 준호예요. 나이가 비슷하니까 요즘 하는 고민도 비슷했죠. 생각하는 것, 추구하는 것이 모두 잘 맞았어요. 영화는 끝났지만 매일 수다를 떨죠. 이런 인연이 작품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운명 같은 그런 거요. 사랑과 우정, 남자들의 의리를 이야기할 때면 봉인 해제되는 김우빈. 친구들을 만날 때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밝은 모습은 비슷해요. ‘치호’처럼 센 멘트나 섹드립은 하지 않지만 친구들과 있을 때 보이는 에너지는 비슷하죠. 평소에 저는 시나리오를 들고 멍 때리면서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치호’한테 공감하기 쉬웠어요. ‘치호’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는 인물로 설정했죠. 저를 닮은 부분이 조금은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다른 점도 있다. 영화에서 부모님이 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치호’는 ‘지급 중단’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땡깡’을 부리지만 김우빈의 수입은 부모님이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치호’처럼 용돈을 받아 쓰다가 최근 신용카드를 하나 만들었다. “키가 커서 옷이 잘 안 맞는 경우가 많아요. 자랑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상당히 불편한 점이죠. 그래서 활동 중에도 제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아요. <스물> 속 클럽 신에서도 제 옷을 입었어요. 길을 가다가도 마음에 드는 옷, 제 몸에 잘 맞는 옷이 있으면 사야 하죠. 부모님에게 이런 사정을 이야기해 최근에 신용카드 발급을 허락받았어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좋아요.(웃음)”
스무 살 청춘의 고민을 연기한 김우빈. 그의 실제 스무 살은 어땠을까? “고등학교 졸업 후 원하던 모델학과에 들어가 신이 났어요. 하고 싶던 공부를 하게 돼 설레었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죠. 모델이 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했어요. 술자리보다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죠. 학교에 ‘쇼장’이 있어 워킹 연습을 하고 밤새 과제도 했고요. 그때는 모델이 되고 싶어 죽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김우빈은 기억 속에서 아른거리는 스무 살을 연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물>을 놓칠 수 없었다. 사실, 무리였다. 1년 365일 스케줄이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스물>은 한계에 도전하는 것과 같았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제가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한 <스물>를 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았죠. 무리를 해서라도 꼭 찍고 싶었어요. 촬영을 다 마친 뒤 가장 먼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스로에게 기특하다고 칭찬해줬죠.”
가장 많이 웃었던 촬영 현장이다. 촬영 기간이 100일이었다면 90일은 웃고 지냈다. 그 뒤에는 이준호와 강하늘, 그리고 이병헌 감독이 있었다. “이병헌 감독님은 천재예요. 저희가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면서 연기할 수 있게 해주셨죠. 앵글에서 벗어난 경우도 많았을 텐데 기가 막히게 담아내셨더라고요.” 이병헌 감독은 강하늘, 이준호보다 특히 김우빈에게 야한 대사를 몰아줬다. 일명 ‘섹드립’. 이병헌 감독은 “김우빈을 생각하며 대사를 썼는데 완벽하게 표현해줬다. 그의 연기가 좋다. 김우빈은 자기 키만큼 시나리오가 쌓였을 거다”라고 칭찬했다. 김우빈은 이병헌 감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보통 한 대사당 대여섯 가지 버전을 준비하는데 야한 대사는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특히 “네 엉덩이에 ××를 비비고 싶어” 같은 대사는 10개 이상 아이디어를 짜냈죠. 감독님께 전부 할 테니 카메라 돌리시라고 했고요. 더 변태스럽게 하거나 애교스럽게, 더 센 버전도 있었는데 가장 노멀한 연기를 선택하셨더라고요. 변태 같은 모습도 많았는데….(웃음)” 출연하는 작품마다 흥행하는 김우빈. 그는 지금 대세 중에 대세다.
“사람들이 ‘대세’라고 하실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더 조심스럽고 신중해지는 것 같아요. 더 잘 맞는 옷을 찾으려고 하는데 워낙 좋은 작품이 많아 고민돼요. 보여드리지 못한 연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는 게 최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물다섯 살 김우빈의 ‘서른’ ‘마흔’은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