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가정에서 자란 한국인 입양아 에밀 윌리엄 맥(Emile William Mack)은 미국 LA소방국 부국장이다. LA의 명문 대학 UCLA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며 한때는 안과 의사를 꿈꿨지만, 우연한 기회에 소방관이라는 직업에 매료돼 진로를 바꿨다. 그가 지난 10월 서울소방재난본부와 재난 관련 업무협약을 맺기 위해 LA소방국 대표로 한국을 찾았다.
맥 부국장이 한국을 방문한 건 이번이 세 번째. 처음엔 한국 아이를 입양할 방법을 찾기 위해 방문했고, 두 번째 방문은 그렇게 얻은 딸 미야를 데리러 오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서울을 방문한 건 일 때문이었지만, 사실 그의 마음 깊은 곳엔 더 간절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를 낳아준 생모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생모를 찾게 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세 살배기 남자아이, LA 흑인 부부에게 입양되다
그는 세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고아원에 맡겨질 당시 아이의 옷 주머니 속에는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메모와 아이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세 살 되던 무렵 그는 고열에 시달리며 병치레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에 사는 한 흑인 부부가 한국인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대상자 명단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입양아 리스트에서 저를 보고 마음이 끌리셨대요. 당시 저는 몸이 아파 입양센터에서는 다른 아이를 권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셨대요. 아버지는 그때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보는 순간 ‘이 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는 입양 절차를 밟으면서 ‘에밀 윌리엄 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갑작스레 변화된 환경에 어린아이가 적응하기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자란 곳은 LA의 남부 지역으로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아인이 다양하게 모여 사는 동네였다.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자랐지만, 동양인 아이는 덩치 큰 흑인 아이들로부터 늘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폭행도 당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단련해야겠다는 걸 깨달았죠.”
그즈음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동양인은 왜소하다는 선입견을 깨기 위해서였다. 상처받고 피폐해진 마음을 추스르는 일도 급선무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는 인종차별의 희생자’라는 생각을 지우기로 했다.
“10대 중반 때 미국 동부 지역에 사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제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 친구도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던 거예요. 심지어 자신의 부모로부터요.”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을 버리자 인내심이 생기며 강해졌다. 그리고 남들을 더 이해하게 됐다. 그러자 그를 괴롭히던 폭력이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생기니 공부도 더 잘됐다. 인종차별 등으로 방황하던 입양 소년이 마침내 서부 최고 명문으로 손꼽히는 UCLA 심리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UCLA 장학생에서 소방대원이 되기까지
“대학 4년을 마치고 의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단짝 친구가 자기는 소방관이 되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시험공부를 같이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하는 거예요. 그러겠다고 했죠.”
미국에서 소방대원이 되려면 5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경찰보다 되기 어려운 것이 소방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1차 필기시험과 2차 체력시험, 3차 전문성 면접, 4차 인성 면접, 5차 최종 면접을 모두 합격해야만 소방대원의 자격이 주어진다. 미국의 소방대원 선발이 이렇듯 까다로운 것은,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소방관은 그 어떤 프라이빗한 공간이라도 들어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비밀 금고든 은행의 금고든 불이 난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성이나 자질을 까다롭게 볼 수밖에 없다. 소방관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직업이기도 하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구하는 매우 숭고한 일이라는 인식이 미국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친구의 시험 준비를 도와줄 목적으로 소방대원에 지원하게 된 맥은 친구와 함께 매일 도서관에서 시험 대비용 자료를 준비하고 공부했다. 시험일이 다가오자 친구는 혼자 시험 보러 가는 것이 두렵다며 같이 시험을 보자고 제안했다. 2차 체력시험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운동을 좋아했기에 즐기듯 준비하면 됐고, 시험을 보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2차 시험까지 통과한 후 3차 면접 전형을 치르게 됐다.
“세 번째 시험은 전문성 면접이었어요. 소방국과 관련된 모든 일을 두루 알고 있어야 패스할 수 있는 시험이었죠. 소방관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소방관에게는 어떤 자질이 필요한지 등을 지원자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물론 제 의도는 아니었지만, 3차 면접을 친구와 함께 준비하면서 현직에서 일하는 소방관들을 직접 만났어요. 그들이 말하는 ‘소방관’은 정말 판타스틱한 직업이었죠. 제 안에 잠재돼 있던 본능적인 봉사 정신을 일깨우는 기분이었어요. ‘이 일을 하면 내가 진정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이전까지는 친구를 위해 준비했던 시험이 3차부터는 맥 자신의 시험이 됐다. 그렇게 4차 면접, 5차 면접까지 무사히 마친 그는 친구와 나란히 합격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친구는 몇 해 후 소방관 일을 그만뒀고, 맥은 올해로 36년째 소방국에 근무하고 있다.
LA 한인 타운 폭동 현장에서 느낀 뜨거운 감정
LA소방국에서 소방대원으로 일하며 맥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정이 불안했던 것도, 미국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맥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이었다. 이런 감정은 1992년 4월 29일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맥은 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지금의 아내이자 당시 약혼녀였던 일본계 미국인 제니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사우스 센트럴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도로 위를 달리는데 오른편에서 연기 기둥이 보였다. 화재였다. 몇 시간 후 맥은 긴급 출동 호출을 받고 곧장 화재 진압을 위해 현장에 출동했다.
주 피해 지역은 한국인 상점들. 밤새 불을 껐지만 불길은 더 늘어만 갔다. 심지어 소방대원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흑인들은 한인 상점을 향해 총을 쐈다. 맥은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맥의 생김새는 영락없는 한국인이지만, 그는 흑인 부모 밑에서 자랐다. 한국인과 흑인은 모두 맥의 가족이자 친구였다.
“현장 상황이 심각해지자 철수 명령이 떨어졌고, 순찰차도 한인 타운 앞을 그대로 지나쳤어요. 그걸 보면서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한인이면서 흑인이잖아요. 그런데 그 둘이 총격전을 벌이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니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그날 이후 맥은 다인종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LA 폭동 같은 혼란은 다인종 사회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청소년 시절 상처를 겪으며 다인종 사회에 적응해온 것처럼, 지역 사회 소수 인종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지난 3월에는 시의원을 뽑는 예비선거에도 출마했다. 그가 출마한 13지구는 백인과 라틴계,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이 골고루 사는 지역이다. LA시의회는 15명의 시의원으로 구성된다. 행정권과 입법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권력기관. 선거에서는 아쉽게 패했지만 그는 3년 후에 다시 도전할 예정이다.
에밀 윌리엄 맥 부국장은 올해 3월 시의원 예비선거에 출마했다.
2010년 화재 진압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찍은 사진.
맥은 일본계 미국인 아내 제니와 함께 한국인 미야를 입양했다.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찍은 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올해 초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맥 부국장이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장면.
부부를 꼭 닮은 입양아 미야
맥은 양부모님이 자신을 입양해 사랑과 은혜를 주었듯, 자신도 그 역할을 하고 싶었다. 이미 스물여섯의 장성한 아들이 있지만, 아이를 입양한다면 다른 부모보다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속내를 아내 제니에게 비쳤을 때 그녀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입양할 국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먼저 다가와 한국 아이를 입양하도록 배려해주었다.
막상 한국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자격 심사를 받으려고 하니 문제가 생겼다. 법이 장애물이 된 것이다. 국내 입양특례법에 따르면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나이는 25세 이상 45세 미만이다. 한국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한 2009년, 맥은 이미 50이 넘은 나이였다. 그는 한국계 입양아 출신 미 항공우주연구소 스티브 모리슨 연구원과 한국입양홍보회 최석춘 회장의 도움으로 보건복지부 차관을 만날 수 있었다.
맥의 사정을 전해 듣고, 보건복지부는 2009년에 자체 규정을 바꿨다. 해외로 입양된 한인이 한국 아이를 입양할 경우 연령 제한을 없앤 것이다. 그렇게 입양을 결심하고 2년이 흘렀고, 결국 2010년 9월 그는 태어난 지 8개월 된 한국 여자아이 미야(Miya)를 입양했다. 맥은 그렇게 양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미야 친부모의 사진을 봤는데, 미야의 엄마는 저와 비슷하게 생겼고 아빠는 제 아내와 닮았더라고요. 그러니 미야도 크면 우리 부부를 닮을 거라고 생각해요. 입양은 나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어요. 요즘은 미야 덕분에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맥은 양아버지가 그를 처음 보고 그랬듯, 미야의 사진을 보는 순간 ‘딱 내 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생후 6개월밖에 안 된 아이는 10여 장의 사진 속에서 하나같이 미소 짓고 있었다. 사진을 보지 않아도 미야의 모습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미야를 미국으로 데려오고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맥은 한 가족이 된 딸 미야를 위해 상속권 확인 등 법적 절차에서 한국어 교육, 한국 음식, 생일 파티까지 손수 챙겼다. 그야말로 ‘딸 바보’ 아빠다.
아쉽지만 이번 방한 기간에도 맥 부국장은 생모를 찾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입양센터가 사라져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됐다.
“생모를 원망하지 않아요. 다만 재회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엄마, 저 이만큼 자랐어요’라고 보여주고 싶어요. 나를 길러주신 부모가 소중한 만큼 나를 낳아주신 부모도 소중해요. 제게 생명을 주신 분이잖아요. 사정이 오죽했으면 저를 고아원에 맡겼겠어요. 생모를 만나면 꼭 이 말을 하고 싶어요. Mom, I love you(엄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