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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인공관절수술의 대가 여수애양병원 김인권 원장

“의술(醫術) 위에 인술(仁術)이 있다”는 말이 있다. 김인권 원장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을 듯하다.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청년 의사가 국내 최고의 인공관절수술의 대가가 된 지금까지 그를 지탱한 건 환자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진심 어린 마음이었다.

On October 16, 2013

  • 각종 건강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막상 나와 내 가족이 아프면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막막한 게 현실입니다. <우먼센스>는 매달 릴레이로 ‘명의가 추천하는 명의’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달에는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심영목 원장이 추천한 여수애양병원의 김인권 원장을 만났습니다.

환자 마음 보듬는 인공관절수술의 대가
인터뷰를 하기로 한 시간은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직 수술 중’이라는 말은, 기다림에 익숙한 기자에게도 왠지 모를 초조함으로 다가왔다. ‘기약이 없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인권 원장이 봐야 할 환자는 두 명이나 더 남아 있다고 했다. 빠듯한 일정 중에 잡은 인터뷰이니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여수 시골 마을의 풍경이나 실컷 구경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김인권 원장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불과 40분 남짓한 시간에 그는 남은 두 명의 수술을 번개 같은 속도로(?) 무사히 마치고 약속 장소에 나타난 것이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수술을 원하는 환자들을 그냥 두고 올 수는 없어서…. 그나마 요즘은 여름철이라 환자 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고, 겨울에는 전국에서 환자들이 오기 때문에 쉴 틈이 없어요. 이곳을 찾는 분들이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그 외 생업으로 바쁜 분들이라, 아무래도 일이 적은 겨울에 많이 오시죠. 많을 때는 하루 30명 넘게 수술을 한 적도 있어요.”
물리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살인적인 수술 스케줄은 김 원장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남 여수의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있는 여수애양병원.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이곳에 국내 최고의 인공관절수술의 대가 김인권(62세) 원장이 있다. 일면식도 없는 서울의 큰 암병원 원장이 친히 추천한 ‘명의’라는 말에, 그는 손사래부터 쳤다.
“명의는요, 무슨. 부끄럽습니다. 몇십 년 동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진 재주가 이것뿐인 사람일 뿐이죠. 농담처럼 ‘먹고살려고 한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요.(웃음) 다만 같은 일을 하는 동료 선후배가 그렇게 말씀해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굉장히 뿌듯하고 기분이 좋네요.”
여수애양병원은 인공관절수술의 메카로 불릴 만큼 전국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 정도. 사고나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환자나 무혈성 괴사 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인공관절수술 환자는 대부분 50대 이상의 고령층이다. 이들은 노환으로 인한 ‘퇴행성관절염’ 환자다. 앉고 서는 것은 물론 한 발 내딛는 것 자체가 고역인 환자들이 굳이 멀리 여수까지 온다는 것 자체로 김인권 원장의 실력과 능력은 이미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김인권 원장도 이미 이런 환자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상대적으로 다른 병원에 비해 병원비는 저렴합니다. 그렇다고 수술에 쓰이는 재료를 저렴한 것을 쓰지는 않아요. 부족한 비용수가는 그만큼 수술을 많이 하면서 어느 정도 메워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일종의 ‘박리다매’라고 보시면 돼요.(웃음) 애양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에요. 또 다른 데서 치료를 받다가 결국 마지막 종착역으로 이곳에 오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비용을 최대한 낮추고, 오는 환자들은 무조건 받는다는 것이 저희 병원의 원칙입니다. 이는 우리 병원의 존재 이유기도 하죠. 힘들다고, 치료해봤자 좋아질 것 없다고 환자를 받지 않으면 누가 이 먼 여수 시골까지 찾아오겠어요.”
여수애양병원에는 특진과 예약도 없다. 무조건 대기 순서대로 진료를 보기 때문에 접수창구가 문을 열기 전부터 수십 명이 대기하고 있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또 수술은 나이가 많은 환자부터 하는 것이 원칙이다.
“수술을 하려면 하루 종일 굶어야 하는데,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체력적으로 힘들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나이순으로 한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없거든요.(웃음)”

‘세상이 나보다 다 낫다’는 확신
무엇보다 환자들이 애양병원을 믿고 신뢰하는 이유는 김 원장의 탁월한 수술 실력 덕분이다. 보통 1시간 정도 걸리는 인공관절수술을 그는 20~30분이면 깔끔하게 해낸다. 요즘은 의료 기술이 발달해 관절수술을 하는 로봇이나 내비게이션도 있지만 그는 끝까지 의사가 직접 수술하는 것을 고집한다. 그는 환자 상태를 한 번만 보고도 관절을 얼마나 잘라내야 하는지, 삽입할 인공관절의 크기는 어느 정도가 좋을지 정확히 판단해낸다. 김 원장과 함께 오랫동안 수술팀에 몸담고 있는 다른 스태프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 중국이나 미얀마, 호주 등의 의료진이 그에게 인공관절수술에 대해 배우기 위해 직접 애양병원을 찾기도 한다. 길지 않은 대화 중에도 김 원장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따뜻한 마음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그 때문인지 ‘인공관절수술의 대가’라는 수식어 외에도 김 원장의 이름 앞에 꼭 따라 붙는 수식어가 바로 ‘인술(仁術)’이라는 단어다.
김인권 원장은 1969년 서울대학교 의대에 입학해 1975년에 졸업했다. 5년여의 인턴·레지던트 생활을 마친 뒤 그는 1980년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때마침 공중보건의 제도가 생겨 그는 무의촌에 가게 됐는데, 그때 인연을 맺은 곳이 바로 한센병 환자가 모여 살기로 유명한 소록도다. 인턴 시절에 6개월 정도 소록도에 간 경험이 인연이 됐다. 식생활은 물론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소록도 환자들의 모습이 깊게 각인된 탓일까. 그는 주저 없이 소록도를 선택한 것이다.
“한센병은 잘 알려진 대로 나균에 의해 발생하는 병입니다. 그래서 일명 ‘나병’으로도 불리죠. 공중보건의로 3년간 소록도에 있었던 경험은 제 인생에서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사실 나균은 그다지 위험하거나 해로운 균이 아닙니다. 예방하고 초기에 치료하면 큰 후유증 없이 낫는 병인데, 당시만 해도 한센인에 대한 인식이 워낙 안 좋아서 환자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어요. 다른 환자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병원에 오는 것을 꺼리고, 심지어 일부 의사들조차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치료하지 않는 것은 의사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니죠. 그래서 소록도에 가겠다고 한 것도, 거창한 다짐이나 의사로서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나를 더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죠.(웃음)”
첫딸이 태어난 지 40일 만의 일이다. 사실 고민이 전혀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내 또한 썩 내켜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불리던 고 신정식 소록도병원장을 찾아갔다.
“1977년에 소록도에 6개월 정도 근무하면서 알게 된 분인데, 평소 굉장히 존경하던 분이었어요. 그래서 상의를 드리려고 찾아갔는데, 제가 고민을 얘기하기도 전에 신 원장님이 먼저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시더라고요. 소록도에서 아들 셋, 딸 하나 낳고 아주 건강하게 잘 키웠다고요. 제가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아셨던 거예요.(웃음) 그런데 그 자식들이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잘 컸더군요. 그래서 제 얘기는 하지도 못하고 그길로 당장 아내에게 ‘내려가자’고 했죠.(웃음)”
그렇게 3년 동안 그는 소록도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소록도에 살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은 여전히 ‘청년 의사 김인권’을 기억하고 있다. 요즘도 한센병 환자들 사이에서 그는 ‘우리 원장님’으로 통한다. 가끔 소록도 지인의 소개로 오는 환자는 그에게 늘 ‘치료 1순위’다.
“현재는 한센병 환자들이 대부분 정착촌에 있거나, 애양병원의 요양소에 계세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 그분들의 부탁은 왠지 거절할 수가 없어요.(웃음).그리고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에 비하면, 제가 돌려드리는 것은 절반도 안 될 거예요. 소록도에 있을 때, 한번은 한센병 환자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치료를 받으러 왔어요. 아들은 물론 건강했고요. 들어보니 그 동네 아이들이 집에도 자주 놀러 오고, 아들을 전혀 꺼리지 않는다더군요. 그 아이도 부모가 한센병 환자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주 밝았어요. 저는 소록도에서 ‘세상이 나보다 낫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배웠어요.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값진 깨우침이었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사람의 진심까지 흉내 낼 수는 없다. 그는 눈빛, 그리고 인생 자체로 선의를 말하고 있었다. 겉으로 흉내 내는 친절이 아닌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는 겸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는 오랜 시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한센병 후유증으로 변형된 그들의 외모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소록도에서 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친 뒤, 그는 의사로서 본격적인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소록도에서 의사로서 열정을 불태웠지만, 그는 아직 젊고 의사로서 해보고 싶은 일이 많아 한센병 치료만 하는 소록도가 좁게 느껴졌다. 비슷한 시기에 솔깃한 제안도 받았다. 모교인 서울대병원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한 것. 하지만 그렇다고 서울의 큰 병원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도 선뜻 상상이 가지 않았다고. 결국 선택하게 된 곳이 바로 지금의 여수애양병원이다. 그는 1983년 처음 애양병원에 부임해 지금까지 3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공중보건의로 3년 동안 그는 소록도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소록도에 살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은 여전히 ‘청년 의사 김인권’을 기억하고 있다. 요즘도 한센병 환자들 사이에서 그는 ‘우리 원장님’으로 통한다. 가끔 소록도 지인의 소개로 오는 환자는 그에게 늘 ‘치료 1순위’다"

여수애양병원은 미국 선교사에 의해 1909년 지금의 광주에 처음 지어진 병원이다. 윌리 포사이트 선교사가 길에 쓰러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것이 계기가 돼 차츰 환자 수가 늘어났고 병원의 형태를 갖추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나병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애양병원이 광주에서 여수로 옮긴 것은 1967년으로, 한센병 환자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바다로 둘러싸인 한적한 여수 시골 마을로 거의 쫓겨나다시피 이전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애양병원은 한센병 환자 정착촌을 지원하는 등 환자들의 치료와 인권을 위해 헌신했다. 1980년대 이후 한센병 환자가 급격히 줄면서 애양병원은 소아마비 치료, 인공관절수술 등 또 다른 분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록도에 있으면 한센병만 치료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영역이 너무 좁았어요. 아직 젊을 때라, 한센병 말고도 일반적인 정형외과 질환도 치료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애양병원은 둘 다 할 수 있으니 저에게는 딱 알맞았어요. 지금도 동기들을 보면 잘나가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로 원하는 바를 성취한 사람이 많죠. 하지만 남과 경쟁하면서 살기보다는 저를 굉장히 필요로 하는 곳에, 제가 더 쓸모 있는 곳에 있고 싶었어요. 그때는 무의촌도 많았고, 의료인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아서 더 절박했고요. 서울을 떠나 거의 30년 넘게 살았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잘한 선택인 것 같아요.(웃음)”
그가 부임했을 무렵 애양병원은 소아마비 환자 치료에 전념할 때였다. 하지만 한센병 환자도 함께 치료한다는 소신은 변하지 않았다. 일반 환자들에게 ‘한센병’이 위험한 전염병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소아마비 환자 치료율이 당시 최고를 기록할 정도로 애양병원은 ‘작지만 강한 병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의 ‘인공관절수술 명의’인 김 원장은 당시에는 ‘소아마비 치료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소아마비 환자도 차츰 수가 줄어들었다. 예방 백신이 개발되면서, 환자 수가 감소한 것이다.
“애양병원은 기독교사회복지법인 재단의 병원이지만 기본적으로 운영을 해나가려면 나름대로 활로를 강구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차츰 시대에 맞춰, 환자의 수요에 맞춰 변화해온 것이죠.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인공관절수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사실 애양병원은 1970년대 초 인공관절수술을 국내 최초로 시도한 병원이기도 합니다. 한센병 환자의 재활에 꼭 필요한 수술이었거든요. 그 때문에 애양병원은 한센병 환자를 위한 피부과도 운영하고 있어요.”
애양병원의 이동훈 피부과장은 서울 강남에 개인병원을 개원해 나름대로 잘나가던 피부과 의사였다. 하지만 과거 의료 봉사로 애양병원과 맺은 인연을 잊지 못해 아예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온 가족이 애양병원이 있는 여수로 내려온 케이스다. 명예나 조건이 아닌, 순전히 마음으로 모인 의사들이다. 병원 곳곳을 둘러볼 때 너 나 할 것 없이 마치 주인처럼 병원을 소개하고 반기던 직원들의 모습이 그제야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사이 김 원장의 딸과 아들도 훌쩍 커서 30대가 됐다. 딸은 현재 법조계에서 일하고 있고, 아들은 의대 졸업반이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지방에서 생활하는 것을 힘들어하던 아내도 어느덧 이곳 생활에 적응해 요즘은 김 원장보다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단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매일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이지만 그에게는 그 어떤 인생보다 근사하고 행복한 삶이다.
“제가 1995년에 병원장이 됐으니, 벌써 햇수로 19년째입니다. 남들은 제 삶을 희생한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전혀요.(웃음) 제가 하고 싶은 만큼 실컷 살았죠. 아이들 키우면서 아내와 했던 다짐이 ‘유학은 보내지 말자’였어요. 돈에 쪼들리며 살아야 하고, 가족이 떨어져 살아야 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한테 좋은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요. 제가 이기적인 아빠일까요?(웃음) 하지만 저는 그게 저희 부부나 아이에게 모두 좋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즐기며 하다 보니 어느새 내일모레가 정년입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원장에서) 퇴임하더라도 기운이 닿는 데까지 환자를 보는 것이 제 바람이에요.”
그는 “남자로 태어나서 이렇게 마음 가는 대로 한번 살아보는 것도 꽤 괜찮지 않느냐”며 웃어 보였다. 그를 마주한 내내 미소가 피어올랐다.

(좌)아프가니스탄에서 수술 의료 봉사를 하던 때의 모습. 그의 인술은 국내를 넘어 해외로까지 전파되고 있다. (우)2007년부터 매해 미얀마 양곤국립대학에서 수술 의료 봉사를 하는 김 원장.

처음 소록도에 간 1997년, 고 신정식 소록도병원장에게서 물려받은 수술용 가위. 김 원장은 “버리기가 뭣하고 아직 쓸 만해서”라고 말했지만 30년간 오로지 환자만 생각해온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CREDIT INFO
취재
김은향
사진
조성준,여수애양병원
2013년 07월호
2013년 07월호
취재
김은향
사진
조성준,여수애양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