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Nine). 흔히 사람들은 ‘9’라는 숫자에 두 가지 생각을 품는다. 먼저 아홉수다. 10으로 가기 바로 전 단계에 혹시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는 우려다. ‘아홉수=징크스’를 떠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만족 혹은 희망이다. 우선 9는 한 자리 숫자 중 최고다. 가득 찼다는 의미다. 우려와 반대로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1 자리’의 끝이지만 ‘10 자리’의 디딤돌인 셈. 9를 거쳐야만 두 자리 숫자로 넘어갈 수 있다. 이진욱 역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생각했다. 그는 마치 아홉수를 넘기듯 매 장면 인고의 시간을 견뎠다. 그래서일까? 이진욱은 10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고비를 넘겼고, 가득 채웠으며, 발판을 마련했다.
tvN 드라마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의 (이하 <나인>) 잔향이 남아 있던 6월, 이진욱을 만났다. 종영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나인>과 박선우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나인>에 대한 이야기부터 7년간의 연기 생활, 재발견이라는 평가에 대해 쉴 틈 없이 이야기했다.
뒤늦은 성장통
올해로 배우 7년 차. 이진욱은 지난 2006년 드라마 <연애시대>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젠틀한 이미지 덕분에 귀공자 캐릭터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손예진, 김희선, 배두나 등 당대 톱 여배우들의 상대역을 꿰차며 주가를 올렸다.
“데뷔하자마자 많은 작품이 들어왔어요. 모든 작품이 영광스러웠죠. 그땐 선택을 당하는 입장이었고, 거절할 수 없는 신인이었어요. 절 선택하는 사람들도 저에게 원하는 이미지가 따로 있었고요. 비록 고정된 이미지지만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죠.”
하지만 화려한 데뷔가 독이었을까? 만년 귀공자 역할은 이진욱을 욕심 없는 배우로 만들기도 했다. 재벌 캐릭터만 고집한다는 편견도 생겼다. 그때마다 배우로서 공허함을 느꼈고, 점점 위축됐다. 그렇게 뒤늦게 성장통이 찾아왔다.
“어느 날 팬 한 분이 이렇게 묻더군요. ‘왜 이진욱씨는 같은 캐릭터만 하세요?’라고요. 분명 전 주어진 상황에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군 입대 전까지 작품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했어요. 결론은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작품을 하자고 마음먹었죠.”
하지만 마음처럼 상황은 따라주지 않았다. 이진욱은 지난 2011년 군 제대 이후 KBS2 드라마 <스파이 명월>로 컴백했다. 북한군 최고 엘리트 장교 ‘최류’ 역을 맡아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스파이 명월>은 여배우의 촬영장 이탈로 곤욕을 치렀고, 씁쓸한 뒷말을 남긴 채 종영됐다.
“배우 입장에서 잃은 것이 많은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나인>을 이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배우와 스태프 간의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경험했으니까요. 이번 <나인>에서는 좋은 스태프들을 만나 행복했죠. 나중엔 두렵기까지 하더라고요. 다음 작품에서도 꼭 이런 스태프들과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거든요.”
시행착오 끝에 만난 작품은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이하 <로필2>)다. 이진욱은 ‘윤석현’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성숙된 연기를 선보였다. ‘윤석현’의 절제된 감성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의 바람대로 흥행보다는 무언가 얻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사실 한정된 캐릭터만 맡다 보니 움츠러들었어요. 그러다 <로필2> ‘윤석현’을 만나게 됐죠. ‘윤석현’이 힘들 때마다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잖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세상으로부터 절 가뒀어요. 하지만 ‘윤석현’이 그 방에서 나올 때 저도 어느새 성장해 있더라고요. ‘윤석현’을 통해 배운 점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감사한 친구죠.”
<로필2>로 연기 변신에 성공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케이블 드라마 <나인>이다. 이진욱은 3개월간 ‘박선우’로 살았다. 매회 격정적인 장면이 쏟아졌다. 또 장면마다 절제된 감정 연기를 토해내야 했다. 신체적·정신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큰 캐릭터였다.
“‘박선우’ 캐릭터가 모험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꼭 하고 싶었어요. <스파이 명월>을 끝내고 미국에서 대본을 받았는데, 정말 강렬하더라고요. 당장 작가님과 감독님을 만나고 싶었죠. 대본을 8부까지 받아 읽어봤는데 마치 1장처럼 느껴졌어요. 대본의 매력이 너무 커서 원톱의 부담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읽고 나서 바로 소속사에 전화해 무조건 스케줄을 조절해달라고 했죠.”
<나인>의 하이라이트는 ‘박선우’가 과거에서 죽음을 맞는 신이었다. ‘최진철’(정동환 분)의 뺑소니로 천천히 죽어가는 장면이었다. 이진욱은 죽어가는 ‘박선우’를 힘을 빼고 연기했다. 보통 남자 배우들이 눈에 힘을 주고, 고통스럽게 죽는 연기와 상반됐다.
“왜 암 환자들이 암 선고를 받고 여러 과정을 거치잖아요. ‘박선우’도 살려고 노력했다, 포기했다를 반복했죠. 그래서인지 마지막 죽는 신에서는 저절로 힘이 빠지더라고요. 저도 ‘박선우’만큼 아팠고 힘들었으니까요. 그리고 ‘박선우’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요. 하반신 신경은 이미 끊어졌을 거라 생각했죠. 왼팔 말고는 움직일 수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렇게 해서 나온 연기예요. 계산한 것은 없어요.”
"제가 믿고 싶은 판타지는 간단해요. ‘세상의 주인공은 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예요. 연기도, 인생도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거니까요. 작은 배역이라도 그 연기를 할 때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한다면 행복까지는 아니어도 불행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나인>에서 이진욱의 출연 분량은 전체 분량의 80%를 차지했다. 캐릭터에 대한 갈증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하고 싶었던 복합 장르를 원 없이 연기했다. 무엇보다 원톱 남자 주인공으로서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이다. 그렇게 꼬박 7년이 걸려 이진욱에게도 대표작이 생겼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쉽지 않더라고요. 엄청난 분량에 압도됐고요. 모든 신이 넘어야 되는 벽처럼 느껴졌죠. 그럴 때마다 스태프들을 봤어요. 한 배우를 위해 노력하는 진심이 보이더라고요. 너무 힘이 됐죠. 그리고 그 스태프들에게 질 수 없다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정말 낮은 자세로 임하다 보니 대표작이라는 것이 생기더라고요.”
사실 이번 <나인>의 흥행이 마냥 기쁠 수만은 없다. <나인> 이전 이진욱의 대표작은 <로맨스가 필요해 2012>였다. 이 역시 케이블 드라마다. 일부에서는 공중파에서 눈을 낮춰 케이블 드라마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또 ‘케드남’(케이블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라는 선입견도 생겼다.
“중요한 건 채널이 아니라 작품이에요. 시선을 낮춘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골랐고, 그 채널이 케이블이었던 것뿐이에요. 물론 공중파 드라마 섭외도 있었죠. 그런데 <나인> 대본을 본 순간 그 어떤 드라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편견이 힘들지 않아요. 힘든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사람들에게 이진욱이 잊히는 게 더 속상한 일인 것 같아요. 지금은 모든 상황에 감사해요.”
재발견된 이진욱?
이진욱은 현재 뜨거운 인기를 실감 중이다. 톱 배우들만 만든다는 ‘~앓이’의 주인공이 됐고, 연기력까지 재평가받았다. 모두들 ‘이진욱의 재발견’이라며 높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진욱은 재발견이라는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드라마 촬영 중에는 인터넷 반응을 잘 보지 않아요. 연기가 흔들릴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번 <나인> 촬영을 하면서 처음으로 팬카페 반응을 봤어요. 주변 지인들이 좋은 기사나 댓글을 보여주기도 했죠. 좋은 드라마를 찍은 것 같아 뿌듯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뿐이에요. 이젠 ‘박선우’가 아닌 이진욱이잖아요. 그래서 ‘이진욱의 재발견’이라는 말이 너무 민망해요. 그건 발견된 적이 있던 배우들에게 어울리는 말이죠. 전 아예 발견된 적이 없었으니 그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이제 발견되지 않았던 것을 보여줄 때인걸요. 기분은 좋지만 과대평가받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다면 이진욱도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을까? ‘박선우’는 9개의 향으로 과거와 미래를 바꿨다. 이진욱도 ‘박선우’처럼 목숨 걸고서라도 되돌리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지 궁금했다. 한 개의 향이 주어진다면 그가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언제일까?
“<나인>의 과거는 1, 2, 3, 4, 5, 6, 7, 8이 아닐까 싶어요. 1부터 8까지의 과정이 없었다면 9도 없을 거예요. 물론 후회스러운 날도 있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거든요. 과거가 있기에 지금의 저도 있는 거고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현재에 만족해요.”
‘박선우’의 독백 중 이런 대사가 있다. “믿고 싶은 판타지는 믿고,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면 된다”. <나인>의 열린 결말처럼 믿고 싶은 판타지를 믿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진욱에게도 믿고 싶은 판타지가 있을까?
“제가 믿고 싶은 판타지는 간단해요. ‘세상의 주인공은 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예요. 연기도, 인생도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거니까요. 작은 배역이라도 그 연기를 할 때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한다면 행복까지는 아니어도 불행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현재 이진욱은 휴식을 취하며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여러 시나리오와 대본을 받고 신중하게 작품을 고르고 있다. 빠르면 올해 말 컴백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진욱이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작품은 ‘멜로’ 영화다.
“차기작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현재 멜로 영화에 출연을 고심하고 있죠. 이 외에도 좋은 대본만 있다면 영화, 드라마 상관없이 출연할 거예요. 보여주지 못한 것을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풀어낼 생각이에요. ‘박선우’처럼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다면 또 한 번 후회 없이 연기를 하고 싶어요.”
아시아 팬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할 계획이다. 이진욱은 6월 29일 일본에서 팬미팅을 가진다. 팬들과의 만남을 위해 특별 이벤트도 준비했다. 이어 <로맨스가 필요해 2012>와 <나인> 프로모션도 함께 펼칠 예정이다. 한국 팬들과는 팬카페를 통해 교감하고 있다.
“<나인> 이후에 팬카페 회원 수가 30%나 늘었어요. 솔직히 기분이 좋더라고요. 제가 가끔 팬카페에 들러 두서없이 글을 적기도 하고, 뜬금없이 인사만 하고 사라지거든요. 이제는 많은 팬들과 공감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요. 일본 팬들과도 팬미팅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