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2의 전성기’라는 말을 참 쉽게 쓰는데, 배우에게 이 말은 자칫 결례가 아닐까? 특히 주변의 평가나 인기와 상관없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배우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드라마 <여우와 솜사탕>의 주인공으로서 40%가 넘는 시청률을 맛본 뒤에도 그는 아침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꾸준히 넓혀왔다. 조금은 우쭐할 법도 한데, 애초에 자기만족은 그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감정인 것 같다. 한 해 한 권씩 ‘배우 일지’를 쓰며 초심을 가다듬는 그에게 ‘자아도취’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40대 중반의 가장은 외롭다
다. 그건 감독님에게 내가 직접 얘기한 부분이다. “제가 아빠면 아이가 영어로 얘기해줄 때 너무 행복할 것 같은데, 한번 집어넣으면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감독님도 굉장히 공감하더라. 실제로 연기할 때 “영어로 해봐” 그 대사를 하는데, 우리 아이가 했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핑 돌더라. 뼈 빠지게 벌어서 뒷바라지한 보람과 그거 하나를 위해 자신이 희생한 모든 것이 떠오를 때의 복합적인 감정이 어딘지 모르게 참 뭉클했다.
가족이 함께 봐도 좋을 영화인데, 안타깝게 심의가 나지 않았다. 아쉬운 정도가 아니다. 사실 내 아내가 출연하는 드라마 <대왕의 꿈>은 하루에도 30명씩 죽어나가는 장면이 여과 없이 나온다. 우리 아이들도 재미있게 본다. 배우들이 칼 쓰고 액션 하는 장면이 나오면 더 재미있어 한다. 오히려 <전설의 주먹>은 ‘폭력은 나쁘다’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걸 풀어가는 방식이 격투기일 뿐, 철없을 때 무심코 뱉는 말이나 폭력이 나중에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오는지 보여주는 거다. 난 당연히 가족 영화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심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보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면 좋을 영화다.
<전설의 주먹>은 액션 영화로도 통쾌하고 시원한 작품이다. 정두홍 감독이 배우들의 액션 연기를 극찬하더라. 사실 두홍 형이 우리를 가장 걱정했다. ‘전설의 주먹’ 역할로 나오는 황정민, 윤제문, 그리고 나를 처음 봤을 때 “너희를 데리고 어떻게 액션을 찍냐. 난감하다”고 했다. 다들 나이는 40대이고, 제대로 액션을 해본 배우가 없었다. (윤)제문이를 봐도 답이 안 나오지 않나.(웃음) 덩치는 좋은데, 나잇살 붙은 전형적인 중년 남자의 몸인 거다. 정민이는 캐릭터가 권투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날렵한 근육을 만들어야 했다. 나한테는 “뭘 잘하냐?”고 묻길래 “발차기를 잘합니다”라고 했다. 그 앞에서 내 키보다 높은 나뭇가지를 차 보였다. 오디션을 보는 기분이었다.(웃음) 그걸 보더니 “잘하네. 그럼 네 주특기는 발차기.” 이렇게 캐릭터가 만들어진거다.
아들한테 태권도를 직접 배우기도 했다던데. 아들한테 배운 것이 아니라, 아들이 다니는 태권도장에 함께 가서 배운 거다. 나뭇가지를 그렇게 멋있게 차 보였는데도 걱정을 하더라.(웃음) 우리 애가 태권도 2단인데, 잘하는 게 그것뿐이다. 3단까지만 땄으면 하고 바라는데, 그렇게 따기를 싫어한다. 여하튼 아들이 다니는 도장에 따라가서 두 달 동안 발차기만 연습했다.
10년 동안 배우 일지를 써오고 있다고 들었다. <전설의 주먹>은 뭐라고 기록했나? 대부분 부상당했을 때의 과정을 적었다.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다. 그리고 ‘함께해준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감독인 강우석과 홍상수 감독에게 사랑받는 배우다. 영화 속 유준상의 이미지는 ‘강우석의 유준상’과 ‘홍상수의 유준상’으로 기억될 정도다. 당신에게 두 감독은 어떤 의미인가? 두 분에게 공통적으로 존경스러운 부분은 사람에 대한 배려다. 다른 현장에서 작업할 때도 그 두 분을 생각하면서 작업하려고 노력한다. 두 분에게 느낀 만큼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정서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자칫 잘나간다고 우쭐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소홀할 수도 있겠다 싶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길잡이가 돼주신 분들이다.
두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강우석 감독님은 보조출연자까지 다 챙기는 스타일이고, 홍상수 감독님은 스태프 자체가 많지 않지만 자기 식구들은 끔찍이 아끼는 스타일이다. 또 상에 대한 욕심이 없다. 홍상수 감독님이 “(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 작품이 10년, 20년 뒤에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사랑받을 수 있으면 그걸로 끝이야, 준상아”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강우석 감독님은 “내일 7시에 슛이야” 하면 진짜 아침 7시에 시작한다. 그게 사실 말도 안 되는 거다. 1백 명이 넘는 스태프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게 진두지휘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강 감독님은 해낸다. 그걸 옆에서 직접 보고 있으면 믿음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어떤 감독과의 촬영이 더 어려운가? 감독은 ‘OK 사인’을 주는 사람이다. 배우는 ‘OK 사인’을 받도록 움직이는 사람이고. 그 역할을 정확히 해주는 분들이다. 홍상수 감독님은 본인이 ‘OK’할 때까지 수십 번도 찍는 분이다. 한 장면을 70번 찍은 적도 있다.(웃음) 강우석 감독님 스타일은 세 번째 테이크 안에 다 나온다고 보시는 경우고 본인이 OK면 그 뒤엔 누가 뭐라고 해도 끝이다. 배우로서 보면 강우석 감독님은 가끔 ‘한 번 더 가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남고, 홍상수 감독님은 ‘더 나올 게 없을 것 같은데’ 하는 어려움이 있다. 뭐가 더 어렵고, 더 잘 맞고 이런 건 없다. 어찌 됐든 결과물을 보면 두 감독님 모두 ‘최고’를 뽑아내신다.
강우석 감독은 모니터링도 안 하는 걸로 유명하다. 맞다. 모니터를 안 볼 때 좋은 점이 분명 있다. 모니터를 보면 은연중에 그 연기를 따라 하게 된다. 특히 내가 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게 잔상이 남아서 더 똑같이 하려고 한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님은 꼭 모니터링을 하신다.(웃음) “스톱, 여기서는 이렇게 움직이고 여기서 이 사람은 이렇게 움직여야 돼. 저 사람은 목을 이렇게 돌리고” 이런 식의 디렉션이 한 40개 정도 쏟아진다. 그럼 ‘멘붕’ 상태가 된다. 그런데 또 그걸 찍는다. 그 뒤에 또 “모이세요”한다. 이런 걸 네 번만 진행하면 디렉션만 1백50개가 생기는 거다. 그렇게 20~30번 하면 감독님 말이 기억도 안 난다. 그런데 희한하게 오기가 생긴다. 몸에 디렉션이 저절로 배어서 연기가 나오는 상황에 다다르는 거다.
한쪽은 흥행의 마술사, 한쪽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 두 사람의 러브콜을 받는 배우의 기분은 어떤가. 너무 행복하다. 그저 오랫동안 이분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만약 양쪽에서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크랭크인 날짜가 겹치면 어떻게 하나? 괜찮다. 홍상수 감독님은 열흘 이상 안 찍는 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다.(웃음)
"지금은 잘되고 있지만, 여기에 안주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잊히기 마련이다. 딱 3년만 활동을 안 해도 ‘국민남편’ 같은 호칭은 사라져버릴 거다. 공연을 계속하는 이유도, 내가 쉬기 시작하면 무대에는 더 이상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끝’이다. 다시는 이들과 겨룰 수가 없다"
매일 ‘배우일지’ 쓰는 배우
언제나 열정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에너지가 넘친다. 원동력이 뭔가? 당연히 함께해주는 팬들과 관객이다. 내가 <그리스>로 첫 뮤지컬을 시작했을 때 날 응원한 팬들이 있는데, 아직까지 나를 지지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중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아기 엄마가 된 분도 있고. 또 요즘에는 <넝쿨째 굴러온 당신> 때문에 초·중생 팬이 많이 늘었다. 그 친구들이 “아빠라고 부를 수는 없고, 삼촌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그냥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한다. 당연히 되지 왜 안 되겠나.(웃음) 그런 친구들이 공연 때마다 와서 응원해준다. 심지어 일본에 있는 팬들이 직접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분들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난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도 큰 힘이 된다. 내가 홍보에 나서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뮤지컬 한 편에 1백~2백 명의 스태프가 움직이는데, 연기하고 개런티만 받고 쏙 빠질 수가 없는 거다. 그들이 물론 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홍보 같은 건 배우들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하는 거다.
적당히, 이제는 하고 싶은 작품만 골라서 할 수 있는 위치 아닌가? 드라마 같은 경우는 지금 이 나이가 아니면 해볼 수 없는 것이 많다. 내가 마냥 40대 중반에 머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지금은 액면이 30대까지도 봐줄 수 있는 정도지만, 이제 언제 바뀔지 모른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몸도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인기를 만끽할 시간도 없을 것 같다. 내 나이에, 적어도 내 출연분을 매진시키는 ‘티켓 파워’를 느낄 수 있다는 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만큼 연기에 올인할 수 있는 건 아내의 배려가 있기 때문 아닐까? 아내의 역할이 정말 크다. 아내는 지금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잠을 줄이고 열심히 하세요”라고 한다.(웃음) 본인도 같은 일을 하면서, 그렇게까지 해줄 수 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나? 일단 저녁 7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먹는다. 그 시간에 먹는 음식은 다 살로 가기 때문이다. ‘살이 찌면 안 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그리고 워낙 활동량이 많아서 굳이 운동은 따로 안 하는 편이다. 하루에 만 보 이상은 걷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회사에서 한약을 지어줬다. 일 열심히 하라는 의미 아니겠나.(웃음) 생각지도 않았던 배우가 갑자기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이를테면 ‘버렸던 카드인데…’라는 느낌이랄까?(웃음) 확실히 대우가 달라지긴 했다.
찾는 곳이 많다는 건 그만큼 배우로서 행복한 일인데,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그건 계속 고민하고 있다. 지금은 잘되고 있지만, 여기에 안주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잊히기 마련이다. 딱 3년만 활동을 안 해도 ‘국민남편’ 같은 호칭은 사라져버릴 거다. 공연을 계속하는 이유도, 내가 쉬기 시작하면 무대에는 더 이상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끝’이다. 다시는 이들과 겨룰 수가 없다. 노래가 되는 한 계속하고 싶다. 만약 노래가 안 되면 연극을 할 거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성공했다는 생각은 안 한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잊힐 날이 올 수도 있다. 늘 염두에 두고 있는 부분이다.
결국 당신의 기준에서는 ‘오랫동안 무대에 서는 배우가 성공한 배우’라는 것인가? 그렇다. 내 철칙이 ‘어떻게든 버티자’다. 그것도 ‘빡세게 버티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20대에 가장이 됐다. 많이 난감했다. 그때부터 항상 ‘버텨야 한다’는게 내 생활 신조였다. 동생 학비도 대야 했고, 집도 해결해야 했다. ‘버티는’ 근성은 그때부터 만들어진 것 같다. 생활과 현실에 치여 20대는 정신없이 보내고 지금 보상을 받는 것 같다. 20대의 영광보다 40대의 안정감과 성공이 더 좋은가? 요즘은 ‘불혹’이라는 말이 많이 와닿지 않는 시대인 것 같다. 사실 이제 나도 곧 50살이다. ‘2018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쉰 살이 된다. 말하면서도 실감이 잘 안 난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20대 애들과 ‘원터치’를 해도 어떻게든 해볼 만할 것 같다. 물론 조금 밀리기야 하겠지만.(웃음) 몸은 점점 힘들어져도 마음은 아직 젊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나이대를 구분하면서 인생의 성공을 논하는 것은 아직 잘 모르겠다.
연기 외에 다른 ‘끼’도 많다. 자작곡도 만들고 있다고 들었다. 올해엔 음반이 나올까? 11곡 정도는 편곡까지 마무리한 상태다. 이제 녹음만 하면 된다. 여러 가지 고민이 있다. 내가 노래를 직접 부를까, 아니면 다른 가수를 섭외할까, 아직도 고민 중이다. 또 음원을 하나씩 발표할까, 아니면 전부 묶어서 앨범으로 낼까도 고민 중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다. 누가 들어줘야 말이지.(웃음) 그냥 40대 중반의 배우가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 노래들이 결코 나쁘지 않다. 잘하면 마니아층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곡마다 장르가 다 다르다. 힙합도 있고, 클럽 음악도 있다. 어떤 취향이든, 내 음반을 들으면 무조건 한 곡은 걸려들게 돼 있다.(웃음)
오늘의 인터뷰는 유준상의 배우 일지에 어떻게 기록될까? 그게 사실 매일 쓰지는 않는다. 일 년에 한 권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평소에는 잘 안 쓰다가도 후반기가 되면, 그러니까 한 10월 즈음에 안 채워졌다 싶으면 그제야 매일 쓰는 식이다. 방학숙제 몰아서 하는 분위기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