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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직원 복지, 신바람 경영 ‘여행박사’ 신창연 대표 인생 재밌게 사는 법

파격적인 수준의 직원 복지 혜택, 해마다 급증하는 매출…. 신바람 나는 회사, 돈 잘 버는 중견기업의 사장님, 신창연 대표를 만났다. ‘대한민국 펀(FUN) 경영의 1인자’로 불리는 그의 독특한 경영철학과 재미있게 사는 법을 들었다.

On October 14, 2013

사장을 포함한 모든 임원과 팀장은 전 직원의 투표로 선출하고, 해마다 직원과 직원의 부모가 모두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회사. 성형수술비 지원, 자기계발 비용 지원, 사택 제공은 물론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에 이르는 포상금을 걸고 수시로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복장 규제나 복잡한 결제 시스템도 없다. 78세 경비 아저씨까지 모두 정규직인 데다 지난해에는 부산지사의 청소부가 1등 직원으로 뽑혀 5백만원의 포상금을 받았다.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회사일까?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직장인들의 모든 로망이 곧 현실이 되는 이곳은 바로 여행업계의 탄탄한 중견기업 ‘여행박사’다. 직원들의 복지 혜택만큼이나 회사 규모도 해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여행박사’는 지난해에만 매출 1천6백억원을 기록했고, 올해 1분기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매출이 40% 급증했다. 매출액만 보면 5백50억원에 이른다. 1인당 영업이익은 업계의 선두 여행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수준이다.

직원들이 번 돈은 직원들에게 돌려준다

여행업계의 신데렐라로 불릴 정도로 해마다 눈에 띄는 성장세로 외연을 넓혀가는 ‘여행박사’.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파격적인 수준의 사원 복지제도다. 이는 여행박사가 업계, 아니 모든 기업과 직장인들에게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여행박사’에서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복지혜택은 대략 70여 항목에 이른다. 지면에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에서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란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하하. 최근에 부쩍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오는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그거예요. ‘대기업도 하지 못하는 파격적인 복지가 실제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이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능합니다. 제 개인 재산으로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이 번 돈을 나눠 갖는 거니까 이론적으로 불가능할 것이 없어요. 적게 벌면 그만큼 적게 나눠 갖고, 많이 벌면 많이 나눠 갖는 거니까요. 물론 월급은 대표인 제가 가장 많이 받아요. 역시 대표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웃음)”
그가 말하는 ‘여행박사’의 복지 원칙은 아주 간단하다. 직원들이 번 돈은 직원들한테 돌려준다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순환이다. 그는 “간혹 회사 수익이 곧 대표의 재산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욕심만 버리면 어느 회사든 ‘이상적인 복지’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많은 회사에서 ‘조직의 대의’를 위해 직원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어요. 흔히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라’고 말하죠. 그런데 정작 회사는 직원들에게 주인 대접을 해주지 않아요. 그런 말을 강조하는 회사일수록 직원들에 대한 처우는 야박한 것 같아요. 처우를 제대로 해주면 직원들에게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내 일, 내 회사에 저절로 애착을 갖게 되거든요. 전 직원이 그런 마음으로 일하는 회사는 분위기든, 매출이든 뭐가 달라도 달라요.” 회사가 무조건 베풀기만 하면 더러 ‘무임승차’하는 직원들도 있지 않을까? 그의 설명에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저희 회사는 ‘팀별 사납금’ 제도를 통해 인센티브와 복지비용을 충당합니다. 각 팀에서 영업을 하고, 회사에는 정해진 금액을 ‘사납금’ 형태로 내는 거예요. 그 외 나머지 모든 금액은 복리후생 비용과 인센티브로 팀원들이 나눠 갖는 시스템이에요. 우리끼리는 택시회사라는 우스갯소리를 하죠.(웃음) 팀에서 모으는 금액은 회사 경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책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원들에게 돌아가는 거예요.”
이를 통해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다. 회사에 다니는 모든 직원이 즐겁고 재미있게 일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만족도와 행복감을 높이는 것이다. 물론 그도 이런 실험과 성과가 뿌듯하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독지가가 아닙니다. 회사의 복지 정책 때문에 주목받거나 누군가 ‘대단하다’는 식으로 칭찬이라도 하면 사실 듣기가 불편해요. 생색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제 돈으로 봉사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누는 것에 대한 의식이 강한 편이긴 해요. 누군가 저로 인해 조금이라도 행복을 느끼면 그것만큼 짜릿한 일도 없으니까요.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진짜 중독성이 강한 즐거움이죠.”

꿈의 직장에서도 불만은 있다?

그의 독특한 경영철학 덕분에 직원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복지혜택을 누린다. 자기계발이나 취미로 무언가 배우겠다고 신청만 하면 지원비는 물론 성취에 따라 별도의 성과급이 지급되고, 대학 학자금과 학원비가 지급된다. 도서 구입비는 무제한 지급이 원칙이고 본인과 가족 병원비는 연 1천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받을 수 있다. 사내 결혼 시에는 혼수와 신혼여행을 회사에서 책임진다. 출퇴근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해 직원 중 절반 이상이 회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사택에서 지내고 있다.
회사 내 모든 직책은 직원들의 ‘직선제’로 임명된다. 1년에 한 번씩 실시되는 투표에는 모든 직원이 입후보할 수 있고, 일정 득표 이상 획득해야 팀장으로 뽑히거나 연임할 수 있다. 그래서 팀장을 하다가 자리를 내놓는 경우도 더러 생기는데, 직책이 ‘강등’됐다고 퇴사하는 직원은 없다. 연임에 반대한 직원들이 작성한 ‘반대 이유’를 책상에 붙여놓고 절치부심해 이듬해 다시 투표에 도전한다. 이런 모든 것이 전혀 새로울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바로 이곳의 분위기이고 문화다. 올해 가장 큰 프로젝트는 드라마 속 본부장처럼 ‘멋있는 본부장 되기’다. 뭐든 지원할 테니 드라마에 나오는 실력, 외모, 매너를 갖추면 1인당 1천만원을 포상하는 이벤트다. 본부장 선에서 호응이 좋으면 점차 팀장, 사원까지 범위를 넓힐 계획이라고.
외부에서 사인할 때 ‘기죽지 말라’는 뜻으로 직원들에게 고급 만년필을 선물한 적도 있다. 사소한 배려나 작은 이벤트가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 회사가 단순히 돈을 벌고, 월급을 받아가는 곳이 아니라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쇼 하지 마라’ ‘너무 강압적이다’ 이런 의견을 본 적도 있어요. 언제든 저에 대한 불만을 말할 수 있는 사내 익명 게시판이 있기 때문에 가끔 뼈아픈 지적도 받죠. 저도 사람인지라 서운하긴 하지만 새겨들을 건 새겨들으면서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제 생각을 일일이 다 답변해줘요. 복지 사항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도 웬만한 건 다 투표로 하고요. 실상 제 마음대로 하는 건 많이 없습니다.(웃음) 그중에 가장 이슈가 됐던 것이 ‘전 사원 금연 정책’이었어요. 저희 회사의 유일한 입사 조건 하나가 ‘비흡연자’거든요. 2~3년 전에 사원들 건강검진을 하는데 한 직원이 큰 병에 걸렸다는 결과를 받았어요. 그 일을 계기로 전 직원 금연 캠페인을 시작했죠. 성공하면 직원 모두 적금과 보험을 들어주겠다는 조건으로요.(웃음)”

직장은 내 인생의 절반을 넘게 보내는 곳인데, 그곳에서 우울하고 무기력하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회사가 단순히 돈을 벌고, 월급을 받아가는 곳이 아니라 내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내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 드라마틱한 인생의 시작

독특한 경영철학만큼이나 그의 개인사 또한 드라마틱하다. 그는 경북 문경의 산동네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때가 1977년이었다. 중학교를 졸업시키는 것까지가 부모의 역할이라는 부모님의 교육 방침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얼떨결에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부모님은 의무교육까지가 부모의 역할이고, 그 이후부터는 각자 알아서 자신의 인생을 찾아야 한다는 의식이 분명했어요. 저희 집이 4남1녀인데 모두 그렇게 내던져지듯 중학교 졸업하고 각자 인생을 살기 시작했죠.(웃음) 어릴 때 저는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어요. 당연한 거니까,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가질 틈도 없이 무조건 먹고살기 위해 17살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포장마차, 주간지 판매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갖가지 아르바이트와 직업을 전전하며 가까스로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패스했다. 그리고 군대에 입대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밴 끼가 가득했어요. 뭐든 남들과 같은 것은 싫어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거든요. 또 서울에 와서도 부모님 간섭 절대 없이 혼자 살았으니 오죽했겠어요.(웃음) 남들보다 몇 년 일찍 사회라는 서바이벌을 배웠지만, 그렇다고 눈치껏 요령껏 하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아 주야장천 ‘마이 웨이’였죠. 그건 누구에게 배웠다거나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기보다 타고난 기질이었던 것 같아요.”
제대 후 그는 뒤늦게 경원대 관광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잘 먹고 잘 놀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선택한 전공이다. 일본으로 무작정 무전여행을 떠나는 등 그의 자유분방한 ‘기행’은 대학시절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1991년 그는 제법 큰 여행사에 입사했다.
“회사에서는 ‘고문관’으로 통했어요.(웃음) 아침잠이 많아 아침 조회는 빠지기 일쑤였고, 도대체 넥타이 색은 왜 똑같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 것을 지적하는 상사들 보면 한심하고 우습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 많은 월급을 받고 고작 한다는 일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 넥타이 색이나 지적하는 거라니, ‘저 사람은 참 할 일도 없나 보다’ 이런 생각을 한 거죠.”
제멋대로인 그를 회사에서 좋아할 리 없었다. 그래도 맡긴 일은 ‘칼같이’ 해내니 쉽게 해고하지도 못했다. 대신 그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회사로 전출되고, 지방 지사를 전전하는 등 쓴 경험도 많이 했다고.
“일에서만큼은 절대 빈틈을 보이지 말자고 마음먹었어요. 영업 목표가 1억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목표를 초과 달성 했죠. 이유는 하나였어요. 내가 욕하는 상사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그리고 속된 말로 말하면 ‘쪽팔리기’ 싫었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상품을 하나 팔든, 회사를 경영하든 ‘창피한 짓은 하지 말자’는 것이 제 신조예요.”
여행박사의 회계재무 상태는 직원이라면 누구나 사내 인트라넷에 접속해 언제든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신 대표가 쓰는 법인카드 사용 내역까지 공개한다. 이처럼 투명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이유는 간단하다. 창피한 짓은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인생의 꿈을 이룬 요즘, 그의 고민은…

그렇게 그는 직장 생활 10년 만인 2000년, 오랜 꿈이었던 자신만의 회사를 차리게 된 것이다. 자본금 2백50만원에 직원은 달랑 세 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사업 수완은 곧 회사의 성장을 견인했다. 2000년대 초반 한창 인기를 끌던 ‘일본 올빼미 여행’의 원조가 바로 여행박사다. “창립 멤버들은 아직도 함께 일하고 있어요. 10년 넘게 장기 근속한 사원들과 작년에는 10박 11일로 크루즈 여행도 다녀왔어요.(웃음) 욕심을 크게 안 부리니까 제가 오히려 직원들한테 받을 때가 많아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는 모 회사와의 복잡한 관계 때문에 파산한 적이 있어요.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인생의 최대 위기였지만, 그때도 전전긍긍하지 않았어요. 당시 직원들이 많은 힘이 됐죠.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내서 여행박사를 재창업했어요. 절반 정도 남은 직원들이 전부 연봉 1원 계약을 한 것도 그때죠.”
다행히 회사는 3개월 만에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6개월 뒤에는 밀린 월급까지 모두 지급했다. 신창연 대표 혼자만의 도전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다. 그렇게 직원들과 함께 모두가 마음껏 일하고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은 지금, 그는 인생의 어느 때보다 여유롭다. 그래도 2백여 명의 직원 밥줄을 책임지는 회사의 경영자라면 나름의 포부나 목표가 있을 법도 한데 그에게 ‘내일의 계획’이란 없다. 전무후무한 꿈의 직장을 만든 그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이유를 물었다.
“회사 분위기만 보면 자칫 제가 굉장히 열정적인 워커홀릭에, 24시간 회사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제가 회사 일에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30대에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일하던 때와는 역할도 분명 달라졌고요. 어떤 일에 미친 듯이 매진하고, 결국 꿈꿨던 것을 이뤘을 때의 허무함 같은 거랄까….”
펀(fun)한 인터뷰의 뻔한 결말을 기대했다가, 의외의 고백에 잠시 멈칫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던 ‘신기한’ 사장님에게도 가슴속 깊이 묵혀둔 비밀스러운 고민이 있다니, 후덕한 사장님보다 훨씬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다시 일상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날은 대체로 사업상 미팅을 하거나 개인적인 시간을 즐긴다고. 그는 회사를 창업하던 2000년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얻었다. 올해로 12살인데, 엄마와 함께 호주에 있어 자주 보지는 못한다.
“어릴 때 성장 환경 때문인지,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개인적인 영역 구분이 남들에 비해 좀 확실한 편인 것 같아요. 아내 인생은 아내 인생, 아들 인생은 아들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여자친구 만난다는 얘기도 당당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웃음) 아들은 1년에 두 번 정도 한국에 올 때 보는데, 역시나 자주 못 보니까 아무리 부자 사이라도 어색한 건 있더라고요. 워낙 어릴 때 갔거든요. 아빠로서 점수를 매기자면 글쎄….(웃음) 아빠 역할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네요. 그렇다고 아이한테 미안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아마 제가 그렇게 커서 그런가 봐요. 저희 부모님이 그런 것처럼 저도 아들 인생은 아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돌이켜보면 17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몸으로 세상을 배운 것인생의 꿈을 이룬 요즘, 그의 고민은…
그렇게 그는 직장 생활 10년 만인 2000년, 오랜 꿈이었던 자신만의 회사를 차리게 된 것이다. 자본금 2백50만원에 직원은 달랑 세 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사업 수완은 곧 회사의 성장을 견인했다. 2000년대 초반 한창 인기를 끌던 ‘일본 올빼미 여행’의 원조가 바로 여행박사다. “창립 멤버들은 아직도 함께 일하고 있어요. 10년 넘게 장기 근속한 사원들과 작년에는 10박 11일로 크루즈 여행도 다녀왔어요.(웃음) 욕심을 크게 안 부리니까 제가 오히려 직원들한테 받을 때가 많아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는 모 회사와의 복잡한 관계 때문에 파산한 적이 있어요.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인생의 최대 위기였지만, 그때도 전전긍긍하지 않았어요. 당시 직원들이 많은 힘이 됐죠.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내서 여행박사를 재창업했어요. 절반 정도 남은 직원들이 전부 연봉 1원 계약을 한 것도 그때죠.”
다행히 회사는 3개월 만에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6개월 뒤에는 밀린 월급까지 모두 지급했다. 신창연 대표 혼자만의 도전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다. 그렇게 직원들과 함께 모두가 마음껏 일하고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은 지금, 그는 인생의 어느 때보다 여유롭다. 그래도 2백여 명의 직원 밥줄을 책임지는 회사의 경영자라면 나름의 포부나 목표가 있을 법도 한데 그에게 ‘내일의 계획’이란 없다. 전무후무한 꿈의 직장을 만든 그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이유를 물었다.
“회사 분위기만 보면 자칫 제가 굉장히 열정적인 워커홀릭에, 24시간 회사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제가 회사 일에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30대에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일하던 때와는 역할도 분명 달라졌고요. 어떤 일에 미친 듯이 매진하고, 결국 꿈꿨던 것을 이뤘을 때의 허무함 같은 거랄까….”
펀(fun)한 인터뷰의 뻔한 결말을 기대했다가, 의외의 고백에 잠시 멈칫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던 ‘신기한’ 사장님에게도 가슴속 깊이 묵혀둔 비밀스러운 고민이 있다니, 후덕한 사장님보다 훨씬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다시 일상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날은 대체로 사업상 미팅을 하거나 개인적인 시간을 즐긴다고. 그는 회사를 창업하던 2000년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얻었다. 올해로 12살인데, 엄마와 함께 호주에 있어 자주 보지는 못한다.
“어릴 때 성장 환경 때문인지,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개인적인 영역 구분이 남들에 비해 좀 확실한 편인 것 같아요. 아내 인생은 아내 인생, 아들 인생은 아들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여자친구 만난다는 얘기도 당당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웃음) 아들은 1년에 두 번 정도 한국에 올 때 보는데, 역시나 자주 못 보니까 아무리 부자 사이라도 어색한 건 있더라고요. 워낙 어릴 때 갔거든요. 아빠로서 점수를 매기자면 글쎄….(웃음) 아빠 역할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네요. 그렇다고 아이한테 미안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아마 제가 그렇게 커서 그런가 봐요. 저희 부모님이 그런 것처럼 저도 아들 인생은 아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돌이켜보면 17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몸으로 세상을 배운 것이 제게 큰 자산이 됐거든요. 그래서 ‘절대 방임주의’가 제 나름의 교육 방침입니다.(웃음)”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가 즉흥적인 제안을 했다. “<우먼센스> 독자분이 여행박사에서 여행 상품을 구입하면 상품 금액의 5%를 할인해주는 이벤트 어떨까요? <우먼센스> 인터뷰 기사를 보고 구입하는 거라고 말만 하면 즉시 할인해주는 거죠.”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펀(fun) 경영’의 1인자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마무리 멘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라면 머지않아 인생의 또 다른 재미를 찾아 도전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는 우리에게 어떤 놀라움을 선사할지, 두고 볼 일이다.

E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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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1인 50만원 이상의 여행상품에 한합니다.)

CREDIT INFO
기획
김은향
사진
조혜원
2013년 05월호
2013년 05월호
기획
김은향
사진
조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