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무덤 앞에서 넋이 나간 채 몸을 떤다. 총탄에 맞은 엄마의 손을 뿌리친, 악몽 같은 순간을 떠올리면서. 1996년 작 <꽃잎>은 한국 영화사에서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첫 번째 작품이다. 소녀와 엄마를 갈라놓은 총격 장면은 실제 사건 현장인 금남로에서 촬영했고, 이후 여러 편의 영화가 시대의 아픔을 직시하며 광주를 그렸다. 전남도청에서 벌어진 시민군의 사투를 묘사한 <화려한 휴가>와 <택시 운전사>, 1980년 5월 광주에서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정의로운 복수를 공모하는 <26년>은 광주를 전면에 내세웠을 뿐 아니라 로케이션으로 담아내어 도시의 실감을 충실히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광주와 광주의 역사는 영상 매체에,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아로새겨졌다.
아픔은 잊을 수 없어도 아픔으로만 광주를 논하긴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예향만큼 이 고장을 뚜렷하게 설명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광주의 풍요로운 예술 문화 자원은 기꺼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무대가 되어 주었다. 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어선 아시아 미술의 허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첩보 영화 <공작>에, 1935년에 개관한 한국 최고령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은 제목에서부터 ‘극장’을 이야기하는 영화 <국도극장>에, 선비 문화가 흐르는 광주의 진산 무등산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연인>에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광주·전남 지역의 유물과 전통을 보존하는 국립광주박물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의 가상공간인 한반도 통일 조폐국을 감쪽같이 연기하기도 했다.
도시의 근대사가 고스란한, 살아 있는 박물관 양림동도 이즈음 영상 제작자들의 이목이 쏠린 촬영지 중 하나다. 개신교 선교사가 거주하던 고풍스러운 주택과 조선 말기의 건축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전통 가옥은 영화 <해어화>와 <밀정> 등 시대극에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올가을, 양림동에서 촬영한 또 하나의 기대작이 공개됐다. 다음 장에서는 이 작품과 더불어 광주의 과거와 현재를 사려 깊은 시선으로 담아낸 영상 콘텐츠 네 편을 소개한다.
이곳에서 촬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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