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숨 가쁘게 지나간다. 더위는 가시고 추위는 닥치기 전, 지난 1년간 햇볕과 공기가 아껴 가꾼 자연이 열매 맺고 알록달록 색이 변하는 아름다운 계절은 눈 깜짝할 사이 절정에 접어든다. 방학처럼, 휴가처럼 좋아서 짧게 느껴지곤 하는 가을. 빠른 KTX를 이용해 40분 만에 아산에 내려 천천히 걸었다. 붙잡고 싶은 계절이 거기 있었다.
100년의 사랑, 신정호
차가운 세상에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 때 더욱 생각나는 온천, 고즈넉한 미의 현충사와 외암민속마을, 이야기와 풍경이 모두 감동을 자아내는 공세리성당, 아산은 매력 넘치는 도시다. 어느 곳이든 계절을 만끽할 만한 아산에서 이번엔 신정호수를 골랐다. 급히 흐르는 계절, 잔잔한 물과 우거진 나무가 어우러진 호수를 산책하며 가을바람을 맞는 일이 그리웠다.
신정호는 1926년 조성한 인공호수다. 조선 시대에 축조한 작은 규모의 저수지를 일제가 현재의 92헥타르(약 27만 8000평) 크기로 넓혀 팠다. 애초 목적이야 물을 확보해 쌀 수확량을 늘리고 그만큼 더 많이 수탈해 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온양온천과 호수 사이 거리는 불과 2킬로미터. 예부터 명성이 자자한 온양온천에는 왕이 자주 행차했고, 행궁 자리에 새로 지은 신정관이 호수를 연계 관광지로 개발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저수지를 신정호라 불렀다. 여행이라는 개념이 갓 퍼져 나간 시절, 온천과 호수는 환상의 여행 코스였다. 일부러 시간을 들여 놀러 간다니. 바다고 계곡이고 우물이고 세상엔 차가운 물만 나는 줄 알았는데 땅속에서 뜨끈한 물이 솟는 조화란 얼마나 놀라운가. 임금님도 몸을 담그고 안질을 고쳤다는 물이다. 개운한 몸 끌고 나와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는 일품 경치를 거닐고, 배 타고 호수에 둥둥 떠서 바람을 맞는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반드시 이동해야 해서가 아니라 그저 음미하려 호숫가를 걷는다. 이전엔 상상도 못 한 차원의 경험. 일상의 피로를 녹이는 웃음이 수면에 넘실거렸다.
격변의 한 세기, 한국의 수많은 장소가 뜨고 지는 동안에도 신정호는 건재했다. 여행지로서 100년 세월을 사랑받았다는 뜻이다. 앞만 보고 달리던 과거에 수질이 나빠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고, 온 나라 여기저기에 번쩍번쩍한 시설이 생겨 일순 관심을 빼앗기기도 했겠으나 호수는 자기 곁을 걷는 이와 묵묵히 동행해 주고 마음까지 안아 주었다. 물과 나무, 자연의 변치 않는 힘이었다. 물론 시대 흐름에 맞춰 ‘자기 계발’도 꾸준히 했다. 4.8킬로미터 길이의 둘레길을 내고 생태공원, 조각공원, 연꽃단지, 꼬리명주나비 생태학습장, 수생식물 전시장, 정자와 쉼터를 마련했으며 물 위에는 덱을 놓았다. 구불구불한 호수의 선을 바싹 따라 걸으면 걸음마다 달라지는 호수 모양과 건너편 산세가 시시각각 감탄스러운 데다 다양한 공간이 나타나 즐거움을 더한다.
산책로 초입 메타세쿼이아 행렬을 지나자 버드나무와 갈대숲이 펼쳐진다. 물기 머금은 땅에서 살아가는 나무의 생명력이 경이롭다. 이름만 같을 뿐 하나하나 생김이 다 다른 나무의 개성 또한 아름답다. 운명이거나 우연이거나 씨앗과 묘목 시절에 자리 잡은 한 뼘 땅에 뿌리 내리고 제 모습으로 자라난 존재다. 그들이 선사한 산소를 들이마시고 다음 숨을 내쉰다. 사람 몇십 명은 제 그늘에 품을 법한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서는 멈추어 호흡을 골랐다. 옆에 의자가 놓였지만 다른 여행자에게 양보했다. 바람에 서걱거리는 이파리 소리가 어느 음악보다 감미롭다. 나무가 지혜롭고 너그러운 기운을 비처럼 내려주는 것 같아, 서 있어도 쉬는 기분이다. 사실은 이 호수를 걷는 매 순간이 그런 기분이었다.
자연과 문화 예술에 맛까지, 신정호 아트밸리
요즘 신정호 일대는 아트밸리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100년을 사랑받은 호수공원이라는 든든한 자산을 바탕에 두고, 호수를 둘러 들어선 맛집에 문화 예술의 향기를 더해 가치를 높이는 프로젝트다. 점점이 이어지는 여러 카페 가운데 3층 규모의 ‘좋은아침 페스츄리’에 들어섰다. 먼저 통유리창으로 바라보이는 호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는 이 카페가 지닌 장점의 시작일 뿐이다. 층고가 높아 시야가 시원시원한 카페에서는 김가을 작가의 <라이트 블루>전이 열리고 있다. 널찍한 공간에 벽면도 여유로워 갤러리로 이용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곳 대표는 손님이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예술까지 향유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며 전시를 기획했다. 물을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의 작품이 공간과 어우러져 서로를 빛낸다.
경기도 안산에서 작은 동네 빵집으로 시작해 다른 지역에 진출한 좋은아침 페스츄리의 빵 맛과 품질은 일단 보장. 서울 플라자호텔 15년 경력의 셰프가 주관하는 식사와 브런치 메뉴도 늘 칭찬받는다. 대표는 손님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테이블 높이를 맞추고 의자도 일일이 앉아 본 다음 장만했다. 아산을 넘어 인근 시군 사람도 단골이 되고 그 덕분에 신정호를 더욱 많은 분이 누린다 느낄 때, 앉아서 쉬러 들어온 손님이 카페 구석구석 작품을 서서 관람하고 오래 머무를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호수 북쪽 5층 규모 카페 ‘나인블럭’ 또한 호수와 문화 예술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열심이다. 전시와 공연을 수시로 진행하는데, 입소문이 나 작가나 아티스트에게 연락이 와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스페셜티 원두로 내리는 커피 맛이 일찌감치 인정받았지만 메뉴 개발에도 힘써 얼마 전에는 쑥밀크티와 하동쑥차 등을 출시했다. 쌀쌀한 계절에 잘 어울릴 맛이다. 이즈음 나인블럭의 놓칠 수 없는 매력 중 하나가 3층의 난로다. 손님은 실제 장작을 때는 난로 ‘불멍’을 하다 호수 쪽 ‘물멍’을 번갈아 하며 일상의 한때를 잔잔한 행복으로 채운다.
50년의 사랑, 계속될 사랑, 은행나무길
여정의 마무리로 은행나무길을 찾았다. 아산은 은행나무와 인연이 깊다. 현충사 내 이순신 장군이 어린 시절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그의 생전부터 지금껏 살아남았다. 아산 출신으로 세종대왕 시절 명재상인 맹사성 선생의 고택은 그가 직접 심은 은행나무 덕분에 ‘맹씨 행단’이라 부른다. 또 하나, 곡교천 은행나무길이 있다.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하고 1973년 진입로에 어린 은행나무 350여 그루를 식재한 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은행나무길이 되었다. 처음엔 자동차 전용 도로였으나 이 길을 사랑하는 이가 늘어나면서 현재는 사람을 위한 길로 바뀌었다.
양쪽에 마주 선 나무가 저 하늘에서 손을 맞댄다. 위를 올려다보면 나뭇잎과 햇살, 바람결에 간간이 드러나는 하늘뿐. 가을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것 같다. 옆의 천변에는 가을꽃이 하늘거리고, 사람들은 산책하고 사진을 찍는다. 자전거 타는 이도 많다. 어느 쪽으로 눈을 돌려도 온통 엽서다. 딱 이만큼만 평화롭고 싶다, 내 마음이나 이 세상이나. 은행나무 아래서 가을의 축복을 온몸으로 받는다. 절정이 따로 있으랴. 그저 지금, 바로 이곳이다.
마주 선 나무가 하늘에서 손을 맞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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