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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이야기꾼, 고정순

그림책은 100퍼센트 현실도, 100퍼센트 허구도 아니다. 세상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의 삶이 그림책으로 피어난다. 고정순은 이야기가 지닌 힘을 믿는 사람이다.

UpdatedOn July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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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작가들은 말한다. 동화책과 그림책은 같지 않다고. 동화책은 보통 어린이를 위한 책이다. 그렇다면 그림책은 무엇일까. 단순하다. 말 그대로 그림이 있으며 어린이, 어른 모두를 위한 책이다. 고정순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봤던 일부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일까지 세심하게 훑는다. 그런 다음 쓰고, 그린다. ‘이대로도 정말 괜찮아?’라는 물음과 함께.

문학도, 화집도 아닌 새로운 언어

고정순은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그 시절 영등포는 특이했다. 백화점 옆에 유흥가가 있고, 번쩍번쩍한 아파트 뒤로 무너져 가는 집이 있었다. 빈부 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환경이 그는 의아했다. ‘세상은 왜 이렇게 간극이 크지?’ 물음을 품고 일찍 집을 나와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직접 부딪혀 본 세상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그렇게 번 돈으로 집 겸 화실을 어렵게 차렸다. 어느 날, 작업실을 같이 쓰는 언니의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책장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큰 책이 꽂혀 있었다. 삐죽 튀어나온 책 하나. 그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림책이었다. 고정순은 ‘그림책’이라는 단어를 그날 처음 알았다. 문학에 속해 있었지만 그는 그림책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고 생각했다. 그림과 글이 어우러져 가벼운 듯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은은하게 전했다. 그림책 속 이야기가 철학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가르치려 들지 않고 어렵지 않게 삶을 말했다. 게다가 그림이 있어 영화적 연출도 가능했다. 경이로운 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림책이라면 의아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림책에 매료되었대도 과언이 아니었다.

<철사 코끼리>는 거친 돌산 아래에 사는 데헷과 그의 친구인 아기 코끼리 얌얌의 이야기다. 데헷은 늘 고철을 주워 친구 얌얌과 함께 돌산 너머 대장간에서 일하는 삼촌에게 가져다준다. 책을 펼치고 얼마 안 되어 얌얌은 죽는다.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이별이 그들을 덮친 것이다. 슬픔에 빠져 있던 데헷은 철사를 모아 얌얌을 닮은 철사 코끼리를 만들고, 그것을 얌얌이라 여기며 어디든 데리고 다닌다. 그러나 철사 코끼리는 얌얌을 대신할 수 없다. 데헷은 결국 삼촌의 대장간에 가서 철사 코끼리를 용광로에 밀어 넣는다. 철사를 녹인 물은 작은 종이 되고, 데헷은 얌얌이 보고 싶을 때 그 종을 연주한다.

<철사 코끼리>를 보면 슬프다가도 익숙한 느낌이 든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와 닮아서다. 삶에는 필연적으로 이별이란 아픔이 찾아온다. 데헷이 그랬듯, 우리는 이별을 맞닥뜨리면 없어진 존재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는다. 사실 사라진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철사 코끼리>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덤덤히 그려 냈을 뿐이다. 고정순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을 건다. 우리가 겪는 것들을 내놓고 괜찮다 말해 주다가도, 세상을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도록 환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곱씹고 있으면 위로가 내려앉아 마음을 다독인다.

책의 주인공은 언젠가 우리 곁을 스친 사람이기도 하다. “제 경험에서 작품을 시작하는 걸 좋아해요. 우리가 처한 현실 자체가 너무나 생생한 이야기잖아요. 어린 나이부터 사회에 뛰어들었더니 이런저런 일이 많았죠. 나의 경험이 모두에게 와닿도록 공통분모를 찾아 엮어 내요.” 청소년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꼬집은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가정 폭력을 당한 아이가 주인공인 <나는 귀신>,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봄꿈>…. 책 속 주인공의 삶은 어쩌면 내일 닥칠 나의 하루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고정순의 그림책이 무겁고 어렵다고 말한다. “거대 담론을 꺼내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저 개인이 행복이나 즐거움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잘못된 것에 무감해요. 내 행복을 지키는 방법을 알아야 문제가 바로잡히고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믿어요.” 그러고는 덧붙인다. “제 그림책은 불편한 책이에요. 외면하던 문제와 대면하게 하니까요. 어렵다기보다 불편하다고 여겨 주시면 좋겠어요.” 


문학에 속해 있었지만 그는 그림책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고 생각했다.
 그림과 글이 어우러져 가벼운 듯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은은하게 전했다.
경이로운 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림책이라면 의아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보폭을 맞추는 그림

그는 그가 펴내는 주제만큼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소재가 생각났는데 화풍이 분위기와 맞지 않으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선다. 학원을 다니거나 영상 플랫폼을 돌며 독학도 했다. 강아지 공장의 실태를 그린 <63일>을 만들 때는 석판화를 배웠다. “가슴 아프고 잔혹한 내용을 편안하게 앉아서 작업하고 싶지 않았어요. 니들로 얇은 석판을 긁어 날카로운 분위기를 표현했죠. 잡티가 많이 묻어나는 석판화의 느낌이 낡고 더러운 공장과 어울리더라고요.”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이야기 <우리 여기 있어요, 동물원>은 판화로, 쓰러져도 일어나 생을 살아가는 작가 자신의 삶을 비춘 <가드를 올리고>는 목탄으로 작업했다. 그가 노력을 쏟아 그려 낸 그림과 이야기는 서로 찰떡같이 어울렸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담으려는 그의 집념 덕분이었다.

고정순은 그림책이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길 바란다. 마냥 어두운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책을 읽고 ‘왜 그런 거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서 세상의 불편한 부분을 더 쉽고 재미있게 전하려 고민한다. “오롯이 이야기만 남아도 좋아요. 저는 이야기꾼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이야기꾼에게는 지금도 세상 구석에 웅크린 존재가 보인다. 그의 머릿속이 세상을 향한 목소리로 가득 찬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이대로 정말 괜찮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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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순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성인이 되자마자 사회에 나가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본래 공예에 관심이 있어 외국에서 조각을 전공하려고 했지만, 그림책의 매력에 빠진 후 그림책 작가를 꿈꿨다. 20대 막바지에 찾아온 난치병 전신 다발성 통증 증후군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통증으로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땐 누워서 그릴 정도로 12년간 집요하게 매달려 2013년 <최고 멋진 날>로 데뷔했다. 이후 <가드를 올리고> <철사 코끼리> <봄꿈> 등을 출간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에세이 <그림책이라는 산> <시치미 떼듯 생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소설 <내 안의 소란>, 만화 <옥춘당>처럼 그림책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로 그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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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남혜림
photographer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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