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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자를 위한 별별 기차역 안내서

사흘 밤낮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역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읽다 지칠 만큼 기나긴 이름을 가진 역도 있다. 6월 28일 철도의 날을 기념해, 환상소설 속에서나 만날 법한 기차역 이야기를 소개한다.

UpdatedOn May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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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아름다운 기차역을 여행하는 특급열차에 올라탄 당신을 환영한다. 우리 열차의 첫 번째 목적지는 아르헨티나 티에라델푸에고 국립공원이다. 티에라델푸에고는 남아메리카 최남단 섬으로,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경계를 이루는 파타고니아 지역에 자리한다. 이곳 국립공원은 바다와 산, 강과 호수, 심지어 만년설과 빙하도 품고 있다. 공원까지 운행하는 관광열차의 이름은 세상의 끝, ‘델핀델문도’. 100여 년 전만 해도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죄수를 동원하고 목재를 실어 나르던 길을 그대로 오간다. 이 철로 끝에는 동명의 종착역인 델핀델문도역이 우뚝 서 있다. 우리의 여정은 세상 끝에서부터 대륙의 북쪽 끝, 미국 알래스카로 뻗어 간다. 탤키트나에서 출발해 셔먼, 골드크리크를 지나 허리케인에 이르는 열차 ‘허리케인 턴’은 인디언리버밸리의 거친 야생과 조우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수단이다. 창밖 풍광을 붙들고 싶다면 주저 말고 “하차!”라고 외치자. 허리케인 턴은 오늘날 ‘깃발 승하차’ 방식을 고수하는 유일무이한 열차다. 이용 방법은 간단하다. 하차 시엔 승무원에게 요청하고, 승차 시엔 철로 근방에서 깃발 혹은 흰 헝겊을 들고 흔들면 된다. 그러니 이 열차에 오른 이상, 마음 닿는 곳이 곧 역이다.

숨 막히는 절경에 이어 다음 기차역은 역명을 읽는 것만으로 숨이 헐떡일 곳이다. 영국 웨일스 앵글시섬 작은 마을에 위치한 이 역엔 ‘Llanfairpwllgwyngyllgogerychwyrndrobwllllantysiliogogogoch’라고 쓰인 간판이 달려 있다. 웨일스어로 ‘흘란바이르푸흘귄거흘고게러휘른드로부흘흘란터실리오고고고흐’라고 발음한다는 역명, 실화일까? 19세기까지만 해도 마을 이름은 ‘흘란바이르푸흘귄거흘’이었는데, 이곳 출신 한 재단사가 영국의 최장 역명을 선점하기 위해 이 엄청난 이름을 고안했다고 한다. 뜻은 ‘빠른 소용돌이 근처 흰 개암나무 분지의 성 마리아 교회와 붉은 동굴의 성 티실리오 교회’라고. 재단사의 놀라운 작명 센스 덕에 이 지역은 세상에서 가장 긴 역명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여행자들이 몰려들어 관광 수입을 쏠쏠하게 올리고 있다. 기나긴 역명을 지나 장대한 열차가 통과하는 역으로 간다. 아프리카 모리타니에는 철광석을 싣고 사막을 달려 항구도시 누아디부에 닿는 화물열차가 있다. 차량 200여 개, 총길이 2.5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열차는 ‘지옥 열차’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열악한 조건을 버티며 운행한다. 이 악명 높은 열차에도 객차가 있고 승객이 있다. 변변한 역사를 갖추지 못한 경유지, 초움역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모험심 가득한 여행자가 이따금 이곳을 찾곤 하는데, 현지 사람들은 백이면 백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고 한다.

삼면이 바다와 만나는 터키 ‘하이다르파샤역’은 해갈의 기쁨을 선사한다. 1872년 개통한 이래 ‘이스탄불의 대문’이라고 불리며 사랑받아 온 이 역은 1909년 신르네상스 양식으로 신축한 후 유려한 미감을 자랑하며 터키의 대표적 건축물로 자리매김했다. 2010년 큰 화재로 일부가 무너지면서 영업을 중단했지만, 2019년에 재건한 지붕을 공개해 여행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제 바다를 건너 호주로 떠난다. 시드니에서 퍼스까지 가로지르는 인디언 퍼시픽 열차의 기이한 경유지, 널라버 평원 한복판에 홀로 선 ‘쿡역’이 우리의 목적지다. 역에 도착하면 ‘앞으로 862킬로미터까지 음식과 연료 없음’이라는 무시무시한 안내판이 승객을 맞이한다. 철도 민영화 이후 쿡역의 존재감은 빠르게 잊혔고, 2009년 이후 쿡은 사실상 유령 도시가 됐다. 관사나 열차를 정비하는 중장비가 여전히 마을 한편에 널브러져 있지만, 제 역할을 하진 못한다. 현재 쿡역은 인디언 퍼시픽 열차만이 드나들며 간신히 여객 수송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의 기차는 앞으로 두 곳의 국경을 지난다. 우선 피레네산맥. 프랑스와 스페인에 걸쳐 있는 이 산맥에 ‘산속의 타이타닉’이라고 불리는 ‘칸프랑크 국제 기차역’이 있다. 창문 365개, 문 156개를 지닌 초대형 국제 기차역으로, 1928년 7월 화려하게 문을 열었으나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1970년 3월 끝내 문을 닫은 비운의 역이다. 안타까워하기엔 이르다. 지역 뉴스에 따르면 현재 5성급 호텔로 부활할 준비를 하고 있다니, 조금 더 기다려 보아야겠다.

끝으로, 우리가 탄 열차의 종착역은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도라산역이다. DMZ 남방 한계선에서 불과 700미터 떨어진 도라산역의 표어는 다음과 같다.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 우리의 여행이 언젠가 이곳에서 다시 시작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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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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