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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에 핀 꽃 낙화

낙화장 김영조가 인두로 한지를 지진다. 수묵이 꽃송이 흩날리듯 곱게 한지를 물들인다. 그를 닮은 낙화가 고아하다.

UpdatedOn January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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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사라져도 보인다. 처음엔 캄캄하기만 하다가, 서서히 선과 질감이 드러나고는 사물과 공간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순간이 온다. 가는 윤곽선 안팎이 짙고 옅은 층을 이루며 어둠에 명암을 들이는 것이다. 환하지 않아도 보이는 광경은 우리가 눈을 감지 않는다면, 보고자 한다면 점점 환해진다. 무엇인들 아니 그러하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세상은 다가와 꽃이 되리니.

더 어둡거나 덜 어두운 농담(濃淡)만으로 빚은 광경을 매일 들여다보는 이가 있다. 그는 한지에서 수묵이 발화하길 기다린다. 달군 인두로 한지를 태워, 선과 질감이 꽃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본다. 낙화(落花)한 꽃송이들의 군무인 양 곱게 번지는 밤빛이 문득 짙고 옅은 층을 이룬다. 명암이 어리고 산과 나무가 솟는다. 김영조가 기다린 이 순간, 그가 그리는 낙화(烙畫)가 점점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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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에 불이 붙길 기다리고,인두가 달궈지길 기다린다. 낙화는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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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걸어온 길

김영조는 낙화장이다. 국가무형문화재 낙화는 나무나 종이를 인두로 지져서 그리는 전통 회화로, 조선 시대 서화 사전 <근역서화징>에 17세기 안동 장씨 부인이 낙화에 능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추사 김정희 또한 조선 낙화의 중흥조 박창규에게 ‘화화도인’이라는 호를 지어 주며 예술성을 칭송했다. 당시 대중에게 친숙했던 낙화는 일제강점기에 더욱 흥해 외국에 알려지기도 했으나 한때 맥이 끊어질 위기를 겪는다. 그리기 힘들고 익히기 어렵고, 그리하여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 지난한 까닭이다. 계속 흐르는 시대가 오늘의 유행을 옛일로 옮기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자취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졌겠는지.

낙화는 어떤가. 안동 장씨 부인과 박창규에서 시작해 박복규, 박진호, 박계담 등으로 이어지는 전승 계보의 현재를 김영조가 지킨다. 그는 “목숨을 걸고” 그렸고 “혼신을 다해” 익혔다. 50여 년간 외길을 걸어 낙화를 예술의 경지에 올렸다. 자신의 삶을 함축한 단어가 비장하건만 인두 끝에서 피어오르는 낙화는 고아하다. 극적으로 표현하자는 게 아니다. 그는 늘 그렇게, 그러한 그림을 그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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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가 달궈진 인두로 한지를 태운다. 선과 질감이 꽃처럼 피어오른다. 명암이 어리고, 산과 나무가 솟는다.

사람이 날마다 맞닥뜨리는 선택의 순간 가운데 몇몇은 일생을 좌우한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겠다 예감하는 순간도 존재하나, 대부분 불현듯 찾아와 선택하는 찰나에 잊힌다. 한참 지난 어느 날엔 걸어온 길을 새삼 헤아리면서, 그때는 행운이거나 불운 혹은 운명이지 않았겠느냐고 자문한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한다. 선택한 이후 경로는 매번 자신이 결정해 나가니까. 걸어온 길을 헤아리는 지금 역시, 실은 미지의 저곳을 향해 걷는 중 아니겠는지.

낙화를 선택한 연유와 그 의미를 묻자 그는 대답하는 대신에 “나에게도 참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웃집 하나 없는 충남 부여 첩첩산중에서 태어난 김영조는 자연과 벗하며 자랐다. 그림을 좋아해 거의 모든 시간 자연을 그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갑작스레 부친이 돌아가시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다. “한 줄짜리 신문광고를 봤어요. ‘낙화, 수강생 모집’. 여기까지라면 그냥 넘어갔겠죠. ‘취업도 가능’. 바로 서울 청계천 2가 작업실을 찾아갔어요.”

한여름, 자그마한 작업실 문을 열자 인두를 달구려 불을 땐 화로들에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밀려왔다. 뜨거워진 시선에 인두 끝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장면이 들어왔다. 낙화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반년 수강료를 한꺼번에 내고 작업실에서 숙식하며 훈련했다. 인두가 식기에 선풍기도 틀지 못하는 한증막 같은 공간에서 정말 좋아서, 너무 재미있어서 밤낮없이 그리기만 했다.

김영조는 답을 내지 않고 내리 이야기했다. 수강생이 줄어 작업실이 문을 닫자 뜻이 맞는 친구들과 사무실을 얻어 독학하다시피 공부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사무실을 비운 뒤에는 함께하던 친구들과 전북 무주구천동 계곡에 가 낙화를 그려 팔았다. 20대 젊은이가 구슬땀 흘려 가며 작업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긴 많은 관광객이 낙화를 구매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속리산, 내장산, 덕유산 등에서 작업실을 열었다. 기념품으로서 인기가 시들시들해진 1990년대 전까지 그는 낙화로 생계를 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또 한 번 전환점을 넘는다. 낙화를 예술로 승화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인연을 만나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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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도’는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의 가로 8미터 넘는 대작 ‘강산무진도’를 낙화로 재현한 것이다.

‘강산무진도’는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의 가로 8미터 넘는 대작 ‘강산무진도’를 낙화로 재현한 것이다.

말 없는 말로 그리는 낙화

‘취업도 가능’이라는 문구가 없었다면, 있더라도 그냥 지나쳤다면, 지나치지 않았더라도 작업실에 갈 용기가 없었다면 이 땅의 낙화는 어찌 되었을까. 김영조는 그날의 의미를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살아온 내력만 계속 말했다. 낙화를 빼고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 그의 삶은 달군 인두처럼 치열하고 한지에 번지는 밤빛처럼 담백하다. 그런 그에게 오늘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미지의 저곳을 향해 걷는 과정일 뿐이니, 그날도 영원히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김영조는 그 사실을 몸짓으로 드러낸다. 낙화는 그리기 전 화로에 풀무질하면서 숯에 불이 붙길 기다려야 한다. 불이 붙은 뒤엔 인두를 넣고 달궈지길 기다린다. 인두를 들고 작업하는 시간은 고작 20초 남짓. 식은 인두를 다시 화로에 넣고 달궈지길 기다린다.

낙화를 그리는 그를 보았다. 단정하게 앉아 정성껏 움직였다. 허리는 꼿꼿했는데 작업을 마칠 때까지 그대로였다. 시선은 한 번도 한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순간을 기다렸고, 순간이 올 때 그렸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꽉 찬 움직임이 이어지던 중 한지에서 산과 나무가 솟아올랐다. 여백은 강물이 되어 흘렀다. 그의 몸짓이 한지에 서려 자연이 되는 광경을 지켜봤다. 김영조는 살아온 내력을 계속 말하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1980년대 어느 날, 한국 서양화의 거장 장욱진 선생이 속리산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의 작업실을 발견했다. “요 옆에 막걸리 마시러 왔어. 이거 그림 재밌다. 나 좀 그려 봐.”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앉아 선생을 그리기 시작했다. 절반 정도 진행했을까.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말했다. “됐어, 그만. 그림 좋다. 잘 그리네. 근데 그림은 완성하면 재미없어. 그리고 나는 요즘 돌멩이에다 매직으로도 그려. 도구나 재료가 중요한 게 아니야. 무엇으로 해도 다 예술이야.”

이것이 또 한 번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낙화를 여행지 기념품 정도로 생각하던 시대를 살았다. 작업실 앞을 지나는 이가 저건 그림도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언제는 아팠겠고, 몇 번쯤 뒤를 돌아봤겠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에 그런 말을 듣기도 했다는 데에서 김영조는 이야기를 끝냈다. 그러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장욱진 선생을 만나고 그는 더 뜨거워졌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등 대작을 수백, 수천 번 모사했다. 연구를 거듭해 수파문, 쇄찰법, 낙묵법을 비롯한 열아홉 가지 낙화 기법을 체계화했다. 김영조는 2010년 충북무형문화재,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낙화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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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찾아서 영원히

자그마한 작업실에서 낙화를 처음 본 후 50여 년이 흘렀다. 오늘날 낙화는 모두가 인정하는 예술이다. 김영조는 일본, 중국, 이탈리아, 타이, 베트남에서 낙화를 전시하고 시연했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에게 충북도청은 도를 대표하는 선물로 낙화를 건넸다. 세상은 변했지만 그는 달라진 게 없다. 50여 년 전 그날과 똑같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시선은 한지에 고정한 채 순간을 기다린다. 정성껏 움직이는 인두 끝에서 어김없이 산과 나무가 솟아오른다. 한지에서 발화한 수묵이 꽃송이들이 추는 군무처럼 곱다. 문득 그가 기다리는 삶의 순간이 궁금했다. 귀로 들리는 이야기와 몸짓에서 느껴지는 이야기가 봄기운인 듯 따듯하게 고인 충북 보은전통공예체험학교 그의 작업실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헤어지기 전, 김영조는 마지막 이야기를 했다.

“제가 낙화에서 찾은 색은 만분의 일도 안 돼요. 인두를 누르는 속도와 깊이에 따라 색이 천변만화하니까요. 여전히 낙화의 색을 찾아가고 있어요.” 김영조는 미지의 세상을 향해 걷는다. 그곳은 끝내 미지로 남을 것이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다만 인두를 들고 묵묵히 그려 나간다. 김영조에게 이보다 귀한 순간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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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맹호도’, 130×70cm, 한지에 낙화


“제가 낙화에서 찾은 색은 만분의 일도 안 돼요.
인두를 누르는 속도와 깊이에 따라 색이 달라지니까요. 여전히 색을 찾고 있어요.”


충북 보은전통공예체험학교에서는 그가 작업해 온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문의 043-542-3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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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게 앉아 정성껏 움직인다. 작업을 마칠 때까지 허리가 꼿꼿하다.
더할 것도 덜어 낼 것도 없는 꽉 찬 움직임 속에서 어느새 산과 나무가 완성된다.

 

김영조 1950년 충남 부여 첩첩산중에서 태어나 자연을 그리며 자랐다. 일찍이 미술에 흥미와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꿈을 키워 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전원 전창진 선생을 사사해 낙화를 공부했다. 생계를 위해 속리산, 내장산, 덕유산에 작업실을 열고 기념품을 제작하는 틈틈이 기법을 연마하던 중 우연히 장욱진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예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0년경 작업실을 모두 처분하고 대작을 모사하는 방식으로 낙화에 깊이를 더해 가는 한편, 기법을 체계화하는 노력을 기울여 2010년 충북무형문화재,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낙화장으로 지정됐다. 세계 각지에서 전시를 열고 낙화를 시연한 김영조는 현재 충북 보은전통공예체험학교에서 작업을 한다. 딸 김유진 씨가 낙화장 전수자로 함께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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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김규보
Photographer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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