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보이는 제가 수리해야 할 기계들은 거의 40~50년쯤 된 빈티지예요. 제가 올해 일흔일곱인데, 같은 시대를 산 기계들도 오는 거죠.”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 했던가? 어수선하고 복잡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정돈된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서 이승근이 기계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는 ‘수리수리 협동조합’의 이사장이다.
“세운상가에서 오랫동안 일한 수리 관련 전문가들이 모인 팀이죠. 문의가 오면 기계에 따라 알맞은 곳으로 보내요.” 그의 전문 분야는 오래된 기계. “웬만한 기계는 다 만져봤죠. 특히 음향 관련 기기가 많아요. 앰프, 턴테이블, 스피커.”
이승근 이사장은 올해로 60년째 이곳 세운상가에서 기계를 수리하고 있다. “어떤 동기가 있어 시작한 건 아니에요. 그냥 초등학생 때부터 기계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어요. 아버지를 따라 청계천 노점을 구경 다니곤 했는데 재밌더라고요. 버려진 기계들 모아다 라디오도 만들고 놀았어요. 이후 공업고등학교에 가서 기본적인 기술을 다 배웠고, 세운상가 인근 골목에 아는 형이 일 한 번 해보라며 불러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의 경력은 1968년 세운상가와 시작을 함께했다. “을지로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새로운 점포들이 들어온 것 외, 큰 변화는 없어요. 건물 하나 더 들어온 거죠. 길목도 그대로고.” 60년간 한자리에서 같은 일을 해온 그에게 점포 몇 개가 바뀌는 건 일상처럼 보였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함께 있던 동료들도 거의 다 떠났어요.
다른 지역으로 간 사람도 있고, 나이 들어서 손 뗀 사람도 있고. 글쎄, 남아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으려나?” 그에게 쉬고 싶지 않은지 묻자 “출퇴근과 ‘땜질’이 몸에 익었어요”라는 말과 함께 일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했다.
“2015년 추억과 사연이 있는 전자제품을 고쳐주는 프로젝트 ‘수리수리얍’ 워크숍을 세 차례 진행했어요. 5개월 동안 수리 요청 1백42건을 접수해 제품을 70건 수리할 정도로 호응이 컸죠. 더는 자신의 기술을 찾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수리 장인의 자부심을 높이고 보람을 느끼는 계기가 됐어요. 취지에 공감하는 후배들과 의기투합해 조합을 만든 거예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에게 기계를 고치는 일은 단순한 직무를 넘어 삶에서 가장 오랫동안 즐긴 취미이기도 하다. “여전히 처음 보는 기계를 보면 신기해요. 모르는 스피커를 보면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소리가 나는지 궁금해지고. 그래서 이 일을 못 그만두는 거예요.”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일을 하고 싶은지 물으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라는 말로 애정을 드러냈다. “기계와의 오래된 추억을 되찾아준다는 보람으로 하는 거지 돈 때문에 하는 일은 아니에요.” 유독 기억에 남은 수리는 뭘까. “워낙 많아요. 특정 기계를 고르기보다는, 할아버지가 쓰던 물건부터 아버지가 쓰던 유품 등 사연 있는 물건을 고쳤을 때 가장 뿌듯한 것 같아요.”
“부품이나 교체품을 못 구하는 게 아니면 고칠 수 없는 음향기기는 없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엔 자신감이 넘쳤다. 거의 모든 기계를 고칠 줄 알지만 그중에서도 오디오 및 음향기기 수리에 특화된 이유에 대해 묻자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은 고장 나면 버리고 신제품을 사잖아요. 하지만 빈티지 오디오는 특유의 음색을 선호하는 마니아가 많아서 고쳐 쓰고 오래 써요. 그러다 보니 음향 계통 기기 수리 문의가 많이 들어오죠”라는 이야길 보탰다.
이승근 이사장은 서울특별시 인증 공식 장인이다. “장인 인증서는 저기 어딘가 있을 거예요. 옛날에는 저 같은 수리공들을 ‘땜쟁이’라며 낮춰 불렀어요.”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변했고, 한 가지 일을 전문적으로 오랫동안 해낸 이라면 장인으로 불릴 만하다. “기술자로서 한평생 이 일만 했는데, 대접받는 것 같으니 기쁘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그래서 세운상가 기술자 하면 제 이름이 언급될 테니 뿌듯해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 일을 진심을 다해 즐기며 오래 한 사람은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60년째 오디오 수리를 한 만큼 고장난 기계를 보면 수리할 곳을 한눈에 알 수 있지 않을까? “간단하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의외로 난제를 만날 때가 있어요. 시간이 한참 걸리게 되고. 한 번에 안 되면 미뤄뒀다가, 쉬다가, 다른 일도 하다가 생각나면 다시 만지고 그래요. 쉽게 고칠 수 있는 고장난 기계는 없는 것 같아요.”
한 대상을 오랫동안 곁에 두고 관심을 주면 애정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거죠. 재밌으니까, 애착이 생기고.” 전문 분야인 오디오 수리 관련 일을 배우고 싶다는 이도 많지 않을까? “요즘은 거의 없어요. 젊은이들 생활 수준만큼 수익이 되는지도 모르겠고요. 직업으로 삼기보다는 취미나 재미로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고치는 기계는 40~50년 된 골동품이고, 저는 그 기계가 신제품이던 시대를 살며 수없이 고쳤으니까 잘 알고 애착이 있지만,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닐 테니까요. 또한 요즘 신제품들은 수리보다 교체하는 게 더 쉽고 빠르잖아요.”
그에게 부여된 장인 인증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아무나 할 수 없고, 그의 지식과 기술은 젊은이의 감각과 속도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빈티지 기계라면 뭐든 수리 가능해요. 다만 요즘 나온 디지털 기반 기계는 수리가 어렵더라고요. 옛날 기계는 어쨌든 수리가 가능해요. 부품이 없으면 그 시기에 나온 비슷한 기계의 부품을 응용해서 고칠 수도 있고, 해외에서 부품을 주문할 수도 있고요. 오래된 기계를 고친다는 건 추억을 되살리는 일이죠. 요즘 나오는 제품이 질도 좋고, 고치는 것보다 싸면 뭐하러 골동품을 고치겠어요. 새 기계를 사는 게 낫죠. 그래서 추억을 되찾아준다는 점에서 내 일에 자부심을 느껴요.” 그런 그가 더 바랄 게 있을까?
“새롭게 느껴지는, 제가 아직 못 고쳐본 빈티지 기계를 고쳐보고 싶어요. 연구하다시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찾아보며 알아가고 싶거든요. 기계는 생산 국가마다 부품이 다 달라. 그래서 생소한 기계들이 많죠. 그런 제품의 수리 문의를 받으면 처음에는 난감하지만, 들여다보고 책을 펼쳐 자료를 찾다 보면 기계가 어떻게 설계됐는지 이해하게 돼요. 그게 얼마나 재밌는지, 참.” 장인이란 뭘까. 단지 한 가지 일을 오래 해서 가능한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낡은 기계를 수리하는 이승근 이사장의 손에서 그가 기계를 수리하며 보낸 지난 60년의 시간이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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